유럽연합(EU)이 전기차 배터리를 비롯한 친환경 기업의 해외 이전을 막기 위해 ‘제3국과 동일한 수준’의 보조금을 주기로 했다.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중국의 공격적 보조금 정책에 맞선 조치다.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강대국들의 ‘보조금 전쟁’이 격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EU 집행위원회는 9일(현지시간) 2025년 말까지 보조금 지급 관련 규정을 대폭 완화하는 ‘한시적 위기 및 전환 프레임워크’를 발표했다. 배터리, 태양광 패널, 탄소 포집·이용 기술 등 핵심 청정기술 관련 기업이 유럽에서 투자를 지속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목표다.
이번 정책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이른바 ‘매칭(matching) 보조금’이다. EU는 “역외로 투자를 전환할 위험이 있는 기업이 대체 지역에서 받을 수 있는 동일한 금액을 지원한다”고 설명했다. 북미에서 전기차와 신재생에너지를 생산하는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미국의 IRA를 겨냥한 것이란 해석이다.
실제 유럽 기업 상당수가 IRA 혜택을 받기 위해 전략을 재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 최대 완성차 업체인 독일 폭스바겐은 미국의 IRA 보조금에 대한 EU 당국의 대응을 기다리면서 동유럽에 신규 배터리 공장을 설립하려던 계획을 전면 보류했다. 폭스바겐이 미국 정부에서 받을 수 있는 보조금은 최대 100억유로(약 14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EU는 보조금의 부작용을 막기 위한 조건도 달았다. 우선 회원국 간의 형평성을 위해 최소 3개 회원국에 걸친 프로젝트여야 하고, 상대적으로 덜 부유한 회원국(1인당 GDP가 EU 평균의 75% 이하)에 더 많은 투자가 이뤄지도록 했다. 자칫 독일 등 일부 국가에 투자가 몰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번 대책은 역내 기업에 보조금과 세액공제 혜택을 제공하는 EU의 친환경산업 육성 청사진인 ‘그린딜 산업계획’의 일환이다. EU는 오는 14일 신규 생산시설 신속 인허가 등을 담은 탄소중립산업법과 핵심 광물 공급망 강화를 위한 핵심원자재법(CRMA) 초안을 공개할 계획이다.
신정은 기자 newyear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