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3월 08일 19:14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러스트벨트(Rust Belt)'라는 용어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미국 대선 때마다 승패를 좌우(swing)하는 주(state)인 '스윙 스테이트'를 일컫는 말로, 20세기에 미국을 세계 패권국으로 이끌었던 북동부 5대호 주변의 전통 제조업 지역입니다. 이곳에 러스트, 즉 '녹슬다'란 딱지가 붙은 건 1980년대였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이 최근 다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작년 9월 인텔의 오하이오주 반도체 공장 기공식에 참석해 '러스트벨트 종식'을 선언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갑작스러운 게 아닙니다. 취임 첫해인 2021년 말에 통과된 인프라 관련 법을 시작으로 작년 8월 인플레이션 관련 법에 이르기까지, 그가 정파를 초월한 지지를 얻었던 '슈퍼 3개 법안'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러스트벨트 종식'이라는 수사에는 정치적 과장이 다소 담겨있지만 목표는 분명합니다. 제조업 재건과 미국 경제 회생입니다.
미국 정부의 재정 투입 규모는 실로 엄청납니다. 먼저 ‘인프라투자·일자리법’은 5500억 달러입니다. ‘반도체·과학법’은 2800억 달러,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은 3900억 달러입니다. 모두 합하면 1조2200억 달러로 2022년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75%나 됩니다. 지원 대상은 청정에너지와 반도체 산업에 집중되어 있는데, 기후변화 대응과 국가 안보라는 대명제가 깔려 있습니다. 물론 이런 정부 주도 정책은 처음이 아닙니다. 1980년대의 반도체 산업 지원과 냉전시대 우주패권 장악을 위한 고등연구계획법 등 전례가 있습니다.
재정 투자는 연방정부 차원에 그치지 않습니다. 주정부들도 앞다투어 다양한 인센티브를 내놓으며 화답하고 있습니다. 조지아주는 전기차 공장 건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거대 자동차기업 포드가 켄터키주, 테네시주 등에 공장을 짓겠다고 하자 포드의 본거지인 미시간주 정부가 부랴부랴 러브레터를 보냈습니다. 조지아주는 이미 산업 중심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켄터키주와 테네시주는 중장년 세대에겐 농업, 링컨, 로큰롤 정도로 기억되는 깡촌들이었습니다.
기업들은 이런 정부의 지원을 반깁니다. 미국 완성차 기업들은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680억 달러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는데 이는 수십년 만에 최대 규모입니다. 태양광 산업의 경우 오하이오주와 조지아주가 기업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반도체는 더 엄청납니다. 애리조나주, 오하이오주 등 16개 주에 걸쳐 투자가 진행 중입니다. 정부 재정 투입의 끝판왕인 IRA 하나만 해도 정부와 민간 투자 규모가 1조7000억 달러로 우리나라 GDP에 맞먹습니다.
이런 변화는 지난 40여년간 미국 정부가 정파를 불문하고 유지해 왔던 자유무역, 감세, 규제완화라는 기조에 완전히 배치되는 것입니다. 미국 정계와 주류 경제학계는 정부 주도의 산업정책을 무시했고, 특히 자유시장론자들은 경제적 승자를 미리 정하는 무모한 짓이라고 폄하했습니다. 오바마 정부의 제조업 회생, 트럼프 정부의 코로나 백신 개발 등 정부 주도 정책이 시도되었습니다만 대부분 낯설었습니다. 정부 개입은 중국이나 일본, 한국, 프랑스 같은 나라에나 해당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생산적인 자유시장입니다. 경제성장의 엔진으로 미래를 먹여 살리는 실리콘벨리도 있습니다. 규제완화와 감세를 통해 성장엔진을 가속화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어디서 생산되든 중요하지 않다. 저렴한 물건은 생활수준에도 바람직하다. 미국은 하이테크 성장에 집중해야 한다”, 이런 주장이 대세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조는 코로나 팬데믹 전부터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세계화로 인해 많은 산업, 특히 제조업이 파괴된 반면 하이테크 성장은 제한적이었고 경제 활력이 떨어졌다는 자성이 일었습니다. 소득 불평등은 극단으로 표출되었고, 러스트벨트를 비롯한 미국 중부 지역은 황폐화됐습니다. 인공지능 등 하이테크의 과실은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보스턴 등 일부 지역에 한정됐습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이런 미국의 대 전환에 세계 각지가 조용할 리가 없습니다. 먼저 유럽연합(EU)이 나섰습니다. EU는 역내에서 생산된 원자재를 사용한 제품에만 혜택을 주는 ‘핵심원자재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풍력과 태양광 등 클린테크 산업 육성을 위한 ‘탄소중립산업법’, 반도체 생산 지원을 위한 ‘EU 반도체법’도 예고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기조 변화에 가장 중요한 동인인 중국은 최근 ‘질량 강국 건설강요(綱要)’를 내세우며 제조업 육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정부 주도의 제조업 르네상스는 그리 새로운 건 아닙니다. 독일은 2012년, 영국과 일본은 2017년, 중국은 2015년, 미국은 2018년부터 이미 제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전략을 수립하며 적극 대응에 나섰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2019년 ‘세계 4대 제조강국’ 비전을 선포했습니다. 다만, 최근 들어 주목을 받게 된 건 미국이 2차산업혁명 이후 100여년 만에, 그것도 디지털 전지전능이라는 시대에 제조업 강국을 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업은 늘 경제 최전선의 회오리에 노심초사합니다. 정부는 전략적 자산이니 고용창출이니 하는 명제를 내세우지만 정부가 바뀌면 과거사로 묻힙니다. 하지만 기업은 자칫하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지난 2년 동안 발표한 미국 내 투자액은 130조원이나 됩니다. 유럽 최대 배터리업체 노스볼트는 미국에 공장을 짓겠다고 선언하며 유럽을 긴장시켰습니다. 세계 최대 배터리업체인 중국의 CATL이 포드와 함께 미국에 공장을 짓겠다고 하자 미국과 중국 정부가 견제에 나섰습니다. 2021년 미국이 공장 건설의 목적으로 해외에서 끌어들인 돈이 6000조원으로 역사상 최대 규모였습니다.
미국발 세계 거대 경제권의 각자도생식 제조업 붐을 보며 국가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는 자유시장의 기수라는 미국이나 절대권위주의 국가 중국 간의 패권전쟁 때문만은 아닙니다. 유럽, 일본, 인도 등 주요 경제권 모두 그 어느때보다 정부가 중요해졌습니다. 특히 세계 공통의 난제인 생산성 정체, 기후 위기, 양극화가 심화된 이 시점에서 ‘고르디아스 매듭’을 풀 정부의 리더십을 더욱 기대하게 됩니다.
챗GPT에게 물었습니다. 한국이 제조업을 육성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경제성장, 수출경쟁력, 기술혁신, 회복력이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 가운데 한국은 전통적인 제조업 강국이자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로, 수출 증대와 일자리 창출 때문이라는 답변이 너무나 익숙했습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인공은 가족과 고객, 세무서 등 모두가 지옥인 현실을 마주합니다. 주인공은 멀티버스에서 수많은 선택지를 두고 헤매다가 목표가 정해지자 용감무쌍해집니다. 우리 기업들과 정부가 처한 현실입니다.
*필자는 삼일회계법인과 KDB산업은행에서 근무했으며 벤처기업 등을 창업·운영하였습니다. 현재는 사모펀드 운용사 서앤컴퍼니의 공동대표로 있습니다. <슈퍼파워 중국개발은행>과 <괜찮은 결혼>을 번역했고 <디지털 국가전략: 4차산업혁명의 길>을 편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