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해결의 끝이 아닌 진정한 시작이다"
박진 외교부장관은 지난 6일 강제징용 해법을 발표하며 그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해법 발표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시작된 한·일 양국 간의 강제징용 협의를 마무리 짓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계 개선을 위한 첫 걸음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실제 이번 해법 발표는 양국이 공동서명하는 합의문이 아닌 '각자 발표' 형식으로 이뤄졌다. 2015 위안부 합의 당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조항에 대한 한국 내 반발이 거셌던 점을 감안해 독소조항은 넣지 않기로 외교 당국이 노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법이 국제법에 따른 합의문에 기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양국의 정치·외교적 상황에 따라 이행 과정이 출렁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양국 경제단체가 공동조성하기로 한 미래청년기금(가칭)에 대한 일본 기업의 참여 규모, 일본 정부의 사도광산 등 강제징용에 대한 태도 변화, 그리고 정부의 피해자 및 야당 설득 과정이 성공적인 해법 이행을 위한 변수로 거론된다.
미쓰비시중공업·일본제철이 한·일관계 발전 기금 낼까 한국 전국경제인연합회와 일본 게이단렌(경제단체연합회)이 공동 조성하기로 한 미래청년기금은 아직 그 윤곽이 드러나지 않았다. 이 기금은 일본 정부와 기업이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한 배상에 참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자, 일본 기업이 한·일관계에 기여할 수 있는 대안적인 통로로 제안됐다.
박 장관은 지난 6일 "한·일 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을 위해 양국 경제계가 자발적으로 기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것으로 안다"며 처음으로 기금을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다만 참여 기업과 규모를 포함한 기금에 대한 정보는 아직 드러난 게 없다. 한·일 양국이 이달 중순께 정상회담을 조율하는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이 무렵 양국 경제단체도 기금에 대한 입장을 발표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게이단렌은 1400여개 회원사로 구성돼있으며 이 중에는 미쓰비시중공업·일본제철 등 강제징용 피고기업도 포함돼있다. 게이단렌이 기금을 만들게 된다면 두 개 기업도 간접적으로 한·일관계 발전에 참여하는 셈이 된다. 다만 게이단렌이 피고기업의 참여 여부를 공개하지 않거나 참여 규모가 미미할 경우 기금의 의미가 퇴색되고 '반쪽 해법'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계묘늑약" "굴욕외교"라는 野·피해자측 설득할 수 있을까 해법에 대한 국내 반발 여론도 변수다. 피해자 측이 정부의 '제3자 변제'와 재단을 통한 공탁에 반대할 경우 또다른 소송전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강제징용특별법'도 정쟁에 휘말려 계류될 수 있다.
강제징용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은 피해자 15명 중 생존한 3명 모두 정부의 '제3자 변제'를 반대하고 있다. 여기서 피해 당사자가 제3자에게 돈을 받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를 한 상황에서 변제가 가능한지 여부에 대한 정부와 피해자 측 의견이 엇갈린다.
만약 정부가 피해자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에 판결금을 공탁한다면, 피해자 측은 다시 공탁금을 무효로 하는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정부는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지 않았거나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피해자들에게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해 각종 지원을 제공하는 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 경우 강제징용특별법을 통해 재단에 법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이러한 특별법을 하루빨리 처리하자는 입장이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8일 TV조선 '뉴스퍼레이드'에 출연해 "강제징용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위한 특별법 제정(안) 마련을 위해서 지금이라도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밀도 있게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진성준 더불어민주당 수석원내부대표는 같은날 KBS 라디오 '최경영의 최강시사'에서 "일본의 책임은 하나도 없고 전부 한국 기업이 대신 변제하겠다고 나오는 것은 해법이 될 수 없다"며 반발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지난 7일 강제징용 해법에 대해 "국가의 자존심을 짓밟고 피해자의 상처를 두 번 헤집는 '계묘늑약'과 진배없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위안부 없다" 망언에 파기된 합의, 강제징용은 인정할까 2015년 박근혜 정부에서 체결된 위안부 합의는 2년뒤 문재인 정부의 파기 선언으로 무효화됐다. 일본 극우 정치인들이 일제 시대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을 일삼으면서다. 강제징용 문제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조치가 있다면 우리 정부가 발표한 강제징용 해법도 빛바랠 수밖에 없다.
'사도광산 세계문화유산 재등재'는 외교당국이 관리해야 할 위험 요인으로 거론된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처음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신청서를 제출한 이후 유네스코로부터 미비접을 지적받아 제동이 걸렸고, 지난 1월 다시 신청서를 제출했다. 사도광산은 일제 당시 우리 국민이 강제노동을 한 지역이다. 일본 정부는 신청서에서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대상 기간을 16~19세기 중반까지로 한정해 조선인 강제노동을 배제, 역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나가오카 게이코 일본 문부과학상은 7일 징용 배상 문제와 관련해 "사도광산의 등재 노력과는 별개의 사안"이라며 사도광산 추진을 이어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우리 정부는 이번 해법이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것으로 일본의 과거사 인식과 별개라는 입장이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지난 6일 "식민집재 불법성과 강제징용 해법은 이제 와서 다시 그 애기를 하는게 관련이 없다 생각해 말씀드리지 않겠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극우 정치인들의 발언까지 우리 정부가 민감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신각수 전 주일본대사는 "아베파를 중심으로 한 자민당 우익에는 늘 과거사를 부정하는 집단이 있다"며 "이들을 상수로 둬야지 이들의 발언에 일희일비해서는 어떤 외교적 결정도 지속되기 어렵다"고 했다.
김인엽 기자 insi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