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3매’ 향기에 이호신 화백 그림까지 [고두현의 아침 시편]

입력 2023-03-03 06:20
수정 2023-04-26 12:12
눈 속의 매화(雪梅)

한 해가 저물어가니 홀로 지내기 어려운데
새벽부터 날 새도록 눈까지 내렸구나.
선비 집 오래도록 외롭고 가난한데
네가 돌아오니 다시 맑은 기운 솟아나네.

歲晩見渠難獨立 雪侵殘夜到天明.
儒家久是孤寒甚 更爾歸來更得淸.

* 조식(曺植·1501~1572) : 조선 중기 학자. 호는 남명(南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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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3매’ 향기와 이호신 화백의 그림

지난번 ‘아침 시편’의 매화시를 읽고, 경남 산청 지리산 자락에 사는 이호신 화백께서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직접 그린 매화 그림까지 파일로 곁들여 주셨군요.

‘선비의 고장’ 산청은 국내 최고령 매화의 집산지이기도 합니다. ‘산청 3매’로 불리는 정당매(政堂梅)와 원정매(元正梅), 남명매(南冥梅)가 다 있죠. 수령이 거의 500~700년에 이릅니다. 사진과 그림으로 동시에 즐기는 매화삼매이호신 화백은 2010년 산청군 단성면에 있는 남사예담촌에 ‘귀촌’했습니다. 남사예담촌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제1호’로 선정된 곳이지요. 그는 이곳 ‘산청 3매’를 비롯해 독자적인 ‘생활산수(生活山水)’를 그려온 한국화가입니다. 생활산수는 풍경 중심의 전통 진경산수(眞景山水) 위에 인간 삶의 속살과 그 이면까지 담아내는 화풍이죠. 이 화백이 그린 ‘산청 3매’는 그래서 남다르고 향기도 깊게 전해져 옵니다.

‘산청 3매’ 중 유일한 홍매(紅梅)인 원정매는 단성면 남사예담촌의 하씨고가에 있습니다. 수령이 690년 안팎이니 가장 나이가 많지요. 고려 후기 문신 하즙(河楫, 1303~1380)이 심은 것으로, 그의 시호(諡號)가 원정이어서 원정매라고 부릅니다. 원목은 2007년에 고사하고 그 뿌리에서 후계목이 자라났다고 하네요.




이곳에 ‘원정공 매화시’도 적혀 있으니, 천천히 음미하며 매향을 즐기면 좋겠습니다.
“집 양지 일찍 심은 한 그루 매화/ 찬 여울 꽃망울 나를 위해 열었네/ 밝은 창에 글 읽으며 향 피우고 앉았으니/ 한 점 티끌도 오는 것이 없어라.”

백매(白梅)인 정당매는 인근 단속사지(斷俗寺址)에 있습니다. 단속사는 통일신라 시대 절인데 지금은 절터와 삼층석탑만 남아 있지요. 정당매는 삼층석탑 뒤쪽 숲속에 있습니다. 고려 말 통정공 회백(淮伯)과 통계공 회중(淮仲) 형제가 어린 시절 이곳에서 공부할 때 심었다고 해요. 훗날 통정공의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러 후대인과 승려들이 이 매화나무를 정당매라 불렀다고 합니다. 약 650년 전 일이지요.




단속사지 입구에 산청 출신 대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시비가 서 있습니다.
“꽃은 조연의 돌에 떨어지고/ 옛 단속사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이별하던 때 잘 기억해 두게나/ 정당매 푸른 열매 맺었을 때.”

시 제목이 ‘유정산인에게 준다(贈山人惟政)’인데, ‘유정’은 사명대사(유정)를 가리키고, ‘조연’은 단속사 앞에 있던 작은 연못을 뜻한다고 하는군요. 워낙 오랜 세월을 견디느라 노거수가 쇠잔해져서 2013년 가지 일부를 접목으로 번식해 후계목으로 대를 잇고 있답니다. 500년 가까이 산천재 밝힌 남명매남명매는 단성면 바로 옆 시천면에 있습니다. 남명 조식이 61세 되던 1561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을 위해 세운 산천재(山天齋) 뜰에 있지요.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듯 올곧은 이 매화를 남명매라고 부릅니다. 올해 수령 462년.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지리산 천왕봉을 배경으로 하얀 꽃망울을 터뜨리는 이 매화를 보려고 수많은 탐방객이 이곳을 찾지요. 남명매 아래에는 ‘우연히 읊다(偶吟)’라는 제목의 남명 시비가 있습니다.

“작은 매화 아래 책에 붉은 점 찍다가/ 큰 소리로 요전을 읽는다./ 북두성 낮아지니 창이 밝아오고/ 강물 넓은데 아련히 구름 떠 있네.”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고 사색을 즐기던 남명의 옛 모습이 눈에 선하죠? 여기에 나오는 강물은 산천재를 에둘러 흐르던 덕천강입니다. 지금은 물길 흐름이 조금 바뀌었지만, 그때부터 이어져 온 매화의 고매함과 선비의 높은 정신을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 표제시로 소개한 ‘눈 속의 매화(雪梅)’도 남명이 이곳에서 쓴 것이지요. 쓸쓸한 노학자의 말년은 엄동에 홀로 지내기도 어려울 정도였으나, 오래도록 외롭고 가난한 선비의 집에 매화가 다시 피어 맑은 기운이 솟는다며 좋아하는 장면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산청 3매 중 원정매와 정당매는 후계목으로 바뀌었지만, 그나마 남명매는 원래 나무 그대로 생명을 잇고 있으니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참, 올해 매화가 어느 정도 벙글었는지 이호신 화백에게 물었더니, 마침 작품전 개막하는 날이라고 서울에 와 있다는군요. 어제부터 ‘한글 사랑 한글 뜻그림’(3월 2~8)을 인사동 백악미술관에서 열고 있답니다.
30년 이상 생활산수와 ‘한글 뜻그림’의 독창적인 세계를 펼쳐온 그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죠. 매화 덕분에 많은 분의 시절 인연이 풍성하게 맺어지길 빕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