빔 벤더스가 현대무용가 피나 바우슈를 추모하며 제작한 영화 ‘피나’는 ‘사계 행진(Seasonal March)’으로 시작한다. 각양각색의 옷을 입은 무용수들은 얕은 언덕을 오르면서 반복적인 동작을 취하는데, 잔디가 돋아나는 봄과 한껏 자라 태양에 닿는 여름, 낙엽이 지는 가을과 추위에 떠는 겨울을 표현한다. 카페 ‘나무사이로’에서 커피를 마실 때면 이 사계 행진이 생각난다. 커피에서는 때로 한껏 물오른 과실 향이 나기도 하며 꽃향기가 풍겨올 때도 있다. 때로는 묵직한 초콜릿이나 갓 구운 빵에서 나는 맛과 향을 느낄 때도 있는데 무용수들이 표현한 사계가 멀리 있지 않음을 깨닫는다.
나무사이로의 커피 중엔 2014년 출시한 시즈널 블렌드 ‘봄의 제전’이 있다. 당시 처음으로 만들어진 원두 패키지에는 영화 ‘피나’에 등장하는 무용수들의 모습이 소박하게 그려져 있었다. 커피를 마시면 봄을 찬양하는 무용수들의 몸짓과 오묘한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느낌이 들곤 했다. 아직도 봄이 되면 ‘봄의 제전’을 한 봉 구매해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의식을 치르곤 한다.
이제 막 20주년을 지난 나무사이로에는 오랜 팬이 많다. 대부분 나와 비슷하게 나무사이로에서만 느낄 수 있는 어떤 깊은 감동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배준선 대표는 “삶이 풍요롭기 위해서는 땀 흘리며 하루의 일을 해내야 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궈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서울 신림동 녹두거리부터 종로 내수동과 내자동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커피를 내렸다.
경기 분당 석운동에 새로이 문을 연 공간 ‘피크닉 앳 더 나무사이로’(사진)는 로스팅 공간이면서 카페를 겸한다. ‘풍요로운 삶’에 대한 이상을 담은 이 공간은 마치 소풍을 온 듯한 마음으로 계절을 담은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꾸몄다. 소풍 오는 이들의 마음을 생각한 이곳에는 빛과 공기가 모든 곳을 관통하며 순환한다. 건물 외벽에 세워둔 칸막이 기둥은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브리즈 솔레이(Brise Soleil: 햇볕을 가리기 위해 건물 창에 댄 차양)’를 닮았다. 자연 요소로만 여겨졌던 빛을 건축요소로 만들어낸 브리즈 솔레이는 콘크리트 시대에 이른 건축이 빛을 다루는 문제에 해법을 내려줬다. 해가 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빛은 시시각각 공간에 그림을 그려낸다. 그 빛은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커피를 내리는 직원이나 마시는 사람들에게 가닿는다. 커피에 계절이 담기듯 공간도 시간에 따라 계절을 담아낸다.
몇 차례 장소를 옮겨야 했던 나무사이로의 지난 20년에는 더 많은 어려움과 위기가 있었을 테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건 언제나 묵묵히 성실하게 커피를 만들어왔다는 사실. 정성을 다해 커피를 재배한 농부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그것이 한 잔의 커피가 되기까지 관계하는 모든 이들이 고루고루 노력의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한 마음이다. 그 마음은 공간이 사라지고 바뀌어도 끊임없이 이어졌고, 마침내 석운동에 꽃을 피웠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공간에 꽃을 피워 풍요로운 삶을 이어나가는 나무사이로에는 어떤 노래 가사에서 이름을 딴 블렌드 ‘새로운 끝’이 있다.
“작은 씨앗을 또 뿌리시네요 / 낮은 풀꽃과 푸른 나무사이로 / 쉬어가는 정다운 친구들 / 모나고 부족한 인생이서서 / 서로 돕고 힘쓰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 너무 다행이에요 / 불러요 우리 함께 기쁨의 노래를 / 조그만 시작에서 조그만 끝으로 / 오래된 시작에서 새로운 끝으로.” (김활성의 ‘새로운 끝으로’ 중)
조원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