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 후 몬태규 노먼 시대의 영란은행[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입력 2023-03-03 07:21
수정 2023-03-03 16:46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영란은행 총재를 맡은 몬태규 노먼 총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918년,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항복으로 끝납니다. 이후 영국과 유럽은 세계 역사의 중심에서 점차 물러나게 됩니다. 몬태규 노먼 남작이 영란은행 총재를 역임한 1920년부터 1944년은 세계의 경제 중심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옮겨가던, 영국 입장에서 보면 어려웠던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몬태규 노먼은 1871년 런던의 켄싱턴에서 태어났습니다. 노먼의 집안은 금융업계에서 유명했습니다. 노먼의 외조부는 영국 중앙은행장을 지냈고, 노먼의 아버지인 프레데릭 또한 '머천트뱅크(예금과 대출의 업무를 제외한 나머지 금융업무를 종합적으로 수행하는 상업은행, 이하 상업은행)'의 이사였습니다. 그의 형과 사촌들 또한 당시 영국 상업은행들에서 높은 직위에 있었습니다.

노먼은 케임브리지대학의 킹스컬리지에서 수학했고, 1892년 그의 아버지가 파트너로 있던 마틴스 은행(Martins Bank)에 입행했습니다. 1894년에는 그의 외할아버지가 파트너로 있던 Brown, Shipley & Co. 라는 투자은행으로 이직하고, 1900년엔 이 회사의 파트너로 승진했죠. 1915년 노먼은 이 회사에서 은퇴하면서 상업은행 커리어를 마칩니다.

1907년, 노먼은 영란은행의 이사로 처음 임명됐고 제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국 정부의 금융 자문을 맡았습니다. 이후 1917년 영란은행의 부총재가 되었고 1920년엔 중앙은행장에 오릅니다. 그는 케인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5년 금본위제로의 복귀를 지지했습니다. 문제는 파운드화와 금의 교환 비율을 제 1차 세계대전 이전과 같게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경제는 그러한 교환 비율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윈스턴 처칠 총리는 "이는 경제적인 문제가 아닌 정치적인 결정"이라며 "이 결정은 우리가 1918년에 필요하다고 발표한 것을 완수할 역량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시작부터 경제적으로 비현실적이었던 1925년 금본위제로의 복귀는 결국 1931년 영란은행이 금태환 중단을 발표하며 막을 내립니다.

노먼이 영란은행 총재를 지낸 기간은 영국이 세계 경제의 패권을 잃고 미국이 부상하던 시기였습니다. 노먼은 1914년부터 1928년까지 미국 뉴욕 연방준비위원장을 지낸 벤자민 스트롱과 개인적으로 친밀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인간적인 신뢰는 미국과 영국이 협력해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질서를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을 됐습니다.

1939년 3월, 나치가 이끄는 독일은 국제결제은행에 있던 체코 계좌의 금을 독일로 이체했습니다. 이후 역사가들이 영란은행의 내부 메모를 조사해본 결과, 노먼 총재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했다고 합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두 달이 지난 그해 가을 노먼 총재는 독일이 체코의 금을 자국의 계좌로 옮기려는 시도를 또 묵인했습니다. 이런 노먼의 행동은 영국 정부 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영국 정부가 직접 나서 독일의 금 이체를 막았습니다. 이후 노먼은 1944년까지 영란은행 총재직을 수행하다 은퇴했습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홍기훈 홍익대학교 경영대 교수, 메타버스금융랩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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