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리사이클링 가방 업체 프라이탁 공장. 옆 공터 바닥에 있는 문을 열면 땅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나온다. 이 계단을 내려가면 42만L 규모의 거대한 지하 물탱크에 물이 찰랑대고 있다. 공장 지붕을 통해 모은 빗물을 파이프로 내려보내 저장하는 곳이다. 매일 5000L의 빗물이 가방 소재로 쓰이는 ‘트럭 방수포’를 씻는 데 사용된다. 가방 원단뿐만 아니라 세척에 필요한 물까지 최대한 재사용하겠다는 회사의 철학이 반영됐다. 전방위적 ‘재사용 경제’
한국경제신문이 한국·스위스 수교 60주년을 맞아 방문한 스위스 산업 현장에서 확인한 대표적인 순환 경제의 모습이다. 과거에는 수명이 끝난 제품이나 소재를 그대로 폐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엔 재사용 기술을 적용해 다른 제품, 원료로 만들거나 기존 제품을 수리·교환해 사용 기간을 늘려주는 비즈니스가 유럽을 중심으로 확대되고 있다.
지난 13일 찾은 프라이탁 공장 한쪽엔 유럽 각 도시에서 들어온 중고 가방이 쌓여 있었다. 사용자가 프라이탁 가방을 한참 쓰다가 망가지면 본사에서 수선한 뒤 다시 보내준다. 버려진 트럭 방수포로 만든 가방 가격은 보통 20만~70만원이다. 겉면에 얼룩이 있어도 소비자들은 앞다퉈 이 가방을 찾는다. 엘리자베스 이세네거 최고마케팅책임자(CMO)는 “흔치 않은 색깔의 트럭 방수포를 보고 가방으로 만들어달라는 고객 요청도 있다”고 말했다. 사용자끼리 가방을 바꿀 수 있는 교환 플랫폼도 운영하고 있다.
스위스 로잔에 있는 커피기업 네슬레 본사에선 커피박(커피찌꺼기)을 펠릿 형태로 만들어 에너지원으로 쓴다. 스위스 정부와 협업해 수거 시스템을 구축, 운영하고 소비자가 배출하는 커피박을 모아 연료로 만든 뒤 이를 공장 가동에 쓴다. 네슬레 본사 내에 원료 수거 부서와 에너지 기술을 담당하는 연구팀을 별도로 두고 있다.
모듈형 가구로 유명한 USM의 뮌징겐 본사는 과거 공장이던 곳을 개조했다. 1961년 세운 공장을 추가로 이어 붙이며 확장해 쓰고 있다. 변형과 확장이 편한 기능성 프레임으로 건물을 지었는데, 이는 USM 재사용 가구에 대한 아이디어의 시작점이 됐다. 어린이용 캐비닛을 아이가 큰 뒤엔 책상으로, 몇 년 뒤엔 TV 서랍으로 다시 조립해 쓸 수 있는 모듈형 가구 등을 판매한다. 알렉산더 쉐러 USM 최고경영자(CEO)는 “재사용은 USM의 중요한 철학”이라고 했다. 스타트업도 ‘돌진’혁신 기업들도 재사용·재활용 시장을 미래 먹거리로 보고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유럽 초기 혁신 기업들이 모여 있는 스위스 바젤 혁신센터엔 재사용이 안되는 콘크리트 대신 폐지, 흙, 나무 등 친환경 소재를 활용한 시험용 주택이 지어지고 있다. 이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건축회사 헤르조그앤드뫼롱의 알렉산더 프란츠 건축가는 “건축 원료는 공유, 재활용, 수리, 재처리를 통해 활용된다”고 설명했다.
로잔연방공과대(EPFL)에서 스핀오프한 테크 스타트업인 알마텍의 루크 블레카 공동창업자는 “지속가능성은 가장 중요한 기업의 테마 중 하나”라고 말했다. 알마텍은 수소를 이용해 탄소 배출량을 대폭 줄인 여객선을 개발한 회사다.
글로벌 재활용 산업의 시장 규모는 2019년 3300억달러(약 434조원)에서 2027년 5137억달러(약 677조원)까지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기업 경영에서 지속가능성이 화두가 되면서 대기업 투자가 이어지고, 기술 발전으로 관련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인공지능(AI) 등을 통해 고품질의 폐기 자원을 분리하는 기술 등도 도입되고 있다.
독일 프랑스 등 인근 유럽 국가에서도 첨단기술을 활용해 재사용 시장에 진출하는 스타트업이 많다. 지난해 독일에서 투자를 많이 받은 스타트업 상위 10곳 중 3곳이 재사용 또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와 관련된 회사였다. 나무와 옥수수 등으로 대체 플라스틱을 제작하는 트레이스레스, 쌀겨로 컵과 그릇을 만드는 크래프팅퓨처 등이 대표적이다. 프랑스의 우유 부산물 활용 스타트업인 락팁스는 1300만유로(약 18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취리히·로잔·뮌징겐·바젤=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