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다윈이 1859년 출간한 <종의 기원>은 인간의 특성을 설명하는 완전히 새로운 틀을 제시했다. 이 획기적인 저작은 자연 선택을 통한 생물의 진화와 적자생존을 통한 다양성 확대라는 통찰을 제공했다. 생물학적 차이에 집중한 다윈은 남자와 여자의 차이 역시 진화론적 관점에서 접근했다. 경쟁적이고 전투적인 유형은 남자의 생물학적 특징으로 진화했고, 순종적이고 유화적인 유형은 여자의 생존 방식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오랜 역사 동안 ‘남자의 뇌와 여자의 뇌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여겨지던 신화에 과학적 증거를 제시한 것처럼 보였다. 18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뇌과학에서도 뇌의 성 차이는 인간의 행동, 능력, 성격, 성취 등 모든 개인 간 차이를 설명하는 주요 도구였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심리학, 사회학, 정치학, 역사학 등 모든 분야에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식의 남녀가 다른 유형의 뇌를 보유한 탓으로 설명됐다.
남녀의 뇌가 다르다는 믿음은 여자가 남자보다 특정 분야에서 부족하다거나 심지어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모욕을 받게 했다. 영국의 뇌과학자 지나 리폰은 <편견 없는 뇌>에서 오랜 뇌과학의 역사와 기존 연구의 문제점을 살펴보며 인간의 뇌가 어느 한쪽이 우월하거나 특정 능력만 발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리폰은 “편견에 빠진 뇌과학이 고정관념을 지지하고 기회 평등의 길을 가로막는 역할을 했다”며 “성차별적인 세상이 성차별적인 뇌를 낳았다”고 말한다.
뇌과학은 남녀의 차이가 없다는 수많은 증거를 찾아냈다. 하지만 작은 차이가 발견되기만 하면 ‘드디어 진실이 밝혀진 순간’으로 여겨지며 열광적인 대중매체에서 환영받았다는 것. 현대의 뇌영상 기술마저 ‘여자는 지도를 읽는데 형편없고 남자는 다중작업에 능하지 못하다’는 등 고정관념을 뒷받침하는 데이터 해석만 쏟아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겉으로 보기엔 타당한 것처럼 보이는 성 차이에 관한 다양한 연구가 허점이 많다고 지적한다. 뇌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뛰어나다는 두개학 이론은 대용량의 뇌를 갖고 있는 고래가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다는 점에서 큰 결함이 있다. 그는 성호르몬에 따라 성격이나 행동양식이 정해진다는 호르몬 연구에 대해서는 모든 가정이 간접적 동물 실험에서 비롯돼 있어 인간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폭로한다. 성별에 따라 특정 뇌의 활성화가 다르다는 뇌영상 역시 성별과 상관없이 각자의 성향에 따라 뇌가 활성화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최근 뇌에 관한 중대한 발견은 뇌가 환경과 경험에 따라 구조를 변화하거나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뇌의 가소성이라 불리는 이 특징은 정보 수집에 관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주도적이다. 뇌는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인 뒤 끊임없이 추측하며 우리의 인생이 순항하도록 돕는다.
저자는 뇌를 변화하게 하는 경험이 사람 또는 집단마다 다르면 뇌 역시 다르게 변화할 수 있다고 전한다. 아기들은 태어난 직후부터 트럭과 인형처럼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에게 다른 장난감이 있다는 사회적 규칙을 무수히 접한다. 성이 구분된 사회적 푯말은 뇌가 노출되는 순간부터 존재하고 강력하다. 남자와 여자는 이런 경험을 학습하며 강제로 구별된 뇌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처럼 후천적으로 발달하는 뇌의 특성을 잘 이용하면 더 이상 남녀의 뇌가 다르다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남성은 기계를 잘 다루고 여자는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는 식의 편견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강점과 약점, 능력과 적성이라는 개인의 뇌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책의 원제는 ‘젠더화된 뇌(The gendered brain)’다. 이미 우리 뇌는 성별을 구분하도록 프로그래밍이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저자는 조카에게 선물할 때, 교사가 돼 아이들을 가르칠 때 등 순간순간마다 뇌의 성별을 구분하려는 고정관념과 싸울 것을 주문한다.
최종석 기자 ellisic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