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화 가치가 축소되는 추세가 지속되면 한국의 무역수지가 개선될 수 있다."
지난 1일 한국은행과 대한상의가 주최한 공동세미나 기조연설에서 신현송 국제결제은행(BIS) 경제보좌관 겸 조사국장이 주장한 가설입니다. 지난 16일 컬럼비아대학교 온라인 세미나에서 비슷한 주장을 합니다. 언뜻 이해되질 않습니다. 기존 경제학 교과서와는 다른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자국 통화의 가치가 절하되면 수출이 늘어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환율이 오르면 수출량이 증가합니다. 달러화가 원화 대비 가치가 상승하게 되면 구매력이 향상되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경제학자 로버트 먼델과 마커스 플레밍이 주창한 '먼델-플레밍' 이론에 따른 해석입니다. 국제수지가 적자면 외환시장에서 외환 수요가 공급을 앞지르며 환율이 상승합니다. 흑자가 나면 환율이 하락합니다. 원화 가치가 달러화 대비 약세를 보이게 되면 수출이 늘고 수입은 줄어 무역수지가 개선됩니다.
신 국장의 이론은 이와 다릅니다. 달러화 가치가 증대될수록 한국에 불리하다는 주장입니다. 실증 조사 결과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지난해 '킹달러'라 불릴 정도로 달러화가 강세였을 때 오히려 한국의 상품 수출은 곤두박질쳤습니다. 2020년 말 미국 달러 지수가 약화했을 때 수출이 정점을 찍었습니다.
세계 전체를 놓고 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2001년부터 2022년까지 달러 인덱스와 세계 GDP 대비 상품 무역 비중을 비교하면 명확히 드러납니다. 2008년 금융위기 때 달러 가치가 떨어질 때 상품 무역 비중이 급증했습니다. 달러 인덱스의 흐름과 세계 무역 흐름이 역(逆)의 상관관계를 보이는 셈입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세계 공급망(Global Supply Chain)이 더 복잡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원자재(수입)→재공품(가공)→완제품(수출) 등으로 공급망이 단순하게 이뤄졌습니다. 한 곳에서 원자재를 구매해 곧장 가공한 뒤 소득 수준이 높은 국가에 판매했습니다. 해외 기업에 가공을 맡기는 오프쇼어링이 확산하기 전 단계입니다.
오늘날은 이같이 단순한 모형으론 설명할 수 없습니다. 글로벌 기업이 늘어나서입니다. 제품은 날이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습니다. 필요한 부품이 수 만가지입니다. 각 공급 단계별로 임가공 하는 업체도 수 천여 개입니다. 애플의 글로벌 공급망에 포함된 해외 기업 수는 약 200여개에 달합니다.
공급망이 정교해진 탓에 이를 관리하는 시장도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리서치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글로벌 공급망 관리 시장 규모는 2020년 155억달러에서 2026년까지 309억달러(약 40조원)까지 성장할 전망입니다. 매년 12%씩 고성장하는 시장이 됐습니다.
공급 단계가 증가하면서 생산부터 완성까지 드는 시간도 늘어났습니다. 기업 입장에선 공급 과정에서 나타나는 시차를 극복하기 위해 완충장치인 재고가 필요합니다. 운전자본(미수금+재고자산)이 늘어나는 이유입니다. 일반 제조기업의 운전자본은 총자산에서 35~50%를 차지합니다.
신 국장은 2005년 글로벌 물류업체 UPS의 톰 프리드먼 최고경영자(CEO)의 발언을 인용합니다. 프리드먼 CEO가 출간한 책 <평평한 세계>에서 "할아버지가 가게를 운영할 때 재고는 뒷방에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화물차나 철도에 실려 수천 개 재고가 이동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신 국장은 '운송 중인 재고(Inventories in transit)'에 집중합니다. 기업이 이 재고에 '투자'를 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과거 완충 장치로만 여겨졌던 재고가 글로벌 공급망을 원활하게 해주는 윤활유 역할까지 도맡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새로운 금융 흐름이 이 과정에서 탄생합니다. 원자재부터 재공품까지 운송하는 데에 자본이 필요해서입니다. 운송장을 떼기 전에 은행에서 대출도 받고, 해상보험을 들어야 합니다. 선적지부터 창고까지 물류비도 발생합니다. 대부분이 국경을 넘나들며 이뤄집니다. 환율과 교역 조건이 끼치는 여파보다 신용과 자본 조달 환경이 공급망에 더 큰 영향력을 끼치는 이유입니다.
국적이 서로 다른 기업은 재고를 통해 밀접하게 결부됩니다. 내 회사 장부에 재고자산으로 적힌 숫자가 상대 기업의 단기 부채로 기재됩니다. 대차대조표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셈입니다. 국적에 상관없이 장부가 엮은 관계입니다. 이를 지탱하는 기둥은 신용과 금융입니다. 공급망 단계가 복잡해질수록 기업이 조달해야 하는 자본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2021년 달러화 가치와 한국 수출이 역관계를 보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각국이 경쟁적으로 경기부양 정책을 펼쳤습니다. 기업이 돈 빌리기 쉬운 환경이 조성됐습니다. 재고 투자가 급증했고 한국도 반사이익을 누렸습니다.
기존 탈(脫)세계화 이론도 달리 해석됩니다. 주류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는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촉발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국경이 한동안 봉쇄됐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지정학적 위기가 촉발하며 세계화에 균열이 발생했습니다.
전쟁과 감염병이 탈세계화를 촉발한 게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세계 교역량을 세계 국내총생산(GDP)으로 나눈 값은 2008년 금융위기 때부터 하락세를 보였습니다. 전쟁과 감염병이 탈세계화의 주범일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미 세계는 조각나고 있었습니다.
국가 간 교역조건보다 기업의 공급망이 더 중요해졌다는 설명입니다. 달러화가 약세에 접어들면 기업들의 외화 조달 환경이 개선됩니다. 전통적인 경제 모형에선 무역이 위축됩니다. 하지만 재고 투자가 늘어나 무역 수지가 개선된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신 국장이 이런 이론을 펼치게 한 계기가 있습니다. 지난 1월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와 애덤 투즈 컬럼비아대 유럽연구소 소장이 탈세계화를 두고 열띤 토론을 펼쳤습니다. 퍼거슨 교수는 "제조업의 경우 패권국가의 대립으로 두 개의 경제권이 형성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투즈 소장은 "지역 단위의 통합 논리가 더 힘을 얻을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신 국장의 조사로 인해 탈세계화 논의가 한 단계 진전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퍼거슨 교수는 신 교수의 가설을 두고 "세계화를 네트워크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며 "핵심 네트워크가 대자 대조표로 엮여 있고, 달러화 가치 상승에 민감하다는 통찰력이 놀랍다"고 평가했습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