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반도체지원법에 따른 보조금 390억달러(약 50조7000억원) 신청을 다음 주부터 받기로 했다.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미국 상무부의 수장은 반도체지원법을 통해 자국에 반도체 제조 클러스터를 최소 두 곳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면서, 자사에 책정된 반도체 지원금 액수에 만족하지 못하는 기업들이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은 23일(현지시간) 조지타운대 강연에서 반도체지원법을 활용해 2030년까지 자국에 반도체 제조 클러스터를 두 곳 이상 조성하겠다고 했다. 러몬도 장관은 “반도체 제조와 연구개발(R&D), 조립, 부품 등을 하나로 묶은 생태계 조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최종 목표는 첨단 반도체 기술을 지닌 모든 기업이 R&D와 대량 생산을 하는 세계 유일한 나라가 미국이 되는 것”이라고 발언했다. 러몬도 장관은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기업인 대만 TSMC를 들며 “우리는 최첨단 반도체 칩의 92%를 대만의 한 기업에 의존하고 있다”며 “지속 불가능한 취약점”이라고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러몬도 장관이 말한 반도체 제조 클러스터의 유력 후보지로 애리조나, 오하이오, 텍사스주가 유력하다고 보도했다. 세계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이 지역에 투자 계획을 갖고 있어서다. 한국 삼성전자는 텍사스, 대만 TSMC는 애리조나주 피닉스, 미국 인텔은 애리조나와 오하이오에 투자할 예정이다.
반도체지원법의 골자는 미국의 반도체 산업 역량 강화를 위해 반도체 생산 보조금 390억달러, R&D 지원금 132억달러 등 총 527억달러를 5년 동안 지원한다는 것이다. 미국 상무부는 이 중 기업에 지급하는 보조금 390억달러에 대한 신청을 오는 28일부터 받기로 했다. R&D 지원금 신청 접수는 수개월 안에 시작하기로 했다.
러몬도 장관은 “반도체지원법의 목적은 경기 침체 우려를 하고 있는 기업들을 지원하려는 게 아니다”라고 선을 긋고 나서 미국의 국가 안보 목표에 부합하는 계획을 가진 반도체 기업들에게 보조금을 주겠다고 했다. 러몬도 장관은 또 “자사에 책정된 보조금 액수에 실망할 기업들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업계에서는 반도체지원법에 따른 보조금을 놓고 반도체 기업들 사이 경쟁이 치열할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지원법 수혜를 기대하며 이미 세계 반도체 기업들이 2000억달러가량의 투자 계획을 발표한 상태여서다.
미국에 투자 계획을 밝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우 중국 반도체 공장 문제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공장, SK그룹은 반도체 R&D센터를 세울 예정이다. 문제는 반도체지원법에 따라 보조금을 받은 기업은 향후 10년 동안 중국 등 이른바 ‘우려국’에서 반도체 생산 역량을 확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을 준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중국에 반도체 공장을 갖고 있다. 이 조항은 범용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존 시설 운영까지 제한하진 않지만, 범용 반도체의 정의가 명확하지 않아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분석이다. 반도체지원법상 범용 반도체는 로직(비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28nm(나노미터)나 그 이전 세대다. 하지만 낸드와 D램 등 메모리 반도체는 특정 규격을 명시하지 않고, 로직 반도체에 준하는 수준으로 상무부 장관이 국방부 장관과 국가정보국장과 협의해 결정하도록 규정해 여전히 불명확하다. 상무부가 작년 10월 발표한 대중(對中) 반도체 수출통제 대상은 미국 기업이 △핀펫(FinFET) 기술 등을 사용한 로직칩(16nm 내지 14nm 이하) △18nm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를 생산할 수 있는 장비·기술 등이다.
한편 이날 미국의 자국중심주의가 아니냐는 질문이 나오자 러몬도 장관은 완전한 자급자족을 원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