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실패했어요.”
시어도어 젤딘의 <인간의 내밀한 역사>는 가사도우미 쥘리에트의 이 같은 말로 시작한다. 쥘리에트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평생을 가정부로 일했다.
이은혜 작가는 쥘리에트를 통해 “저는 혼자예요”라고 말한 이성미 씨를 떠올렸다고 신간 <살아가는 책>에 적었다. 이씨 역시 저자의 살림을 도와주는 가사도우미다. 어릴 때 부모에게 버림받았고, 폭력적인 남편 때문에 별거 중이다. 쥘리에트처럼 자신의 인생은 실패했다고 느끼며 가끔 ‘완전한 소멸’을 꿈꾼다.
인문 출판사 글항아리 편집장인 저자는 작가 25명이 쓴 책의 등장인물과 자신, 친구, 가사도우미 등 주변의 여러 사람을 결부시켰다. 책을 읽으면서 현실의 이야기들을 떠올리고, 이들이 맞물려 읽는 경험이 확대되는 순간을 담았다. 편집과 출판의 고민을 써낸 <읽는 직업>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저자에게 책은 ‘한 권의 버겁지만 귀한 타인’이다. 친밀한 타인처럼 말을 걸어오고 활자 밖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낸다. 수많은 감정과 삶을 넘나들게 하고, 인생을 되돌아보게 한다. 한정원의 <시와 산책>을 읽으면서 저자 자신의 시는 어떤 행과 연으로 이뤄져 있는지 탐구한다. 얀 그루에의 <우리의 사이와 차이>를 통해선 몇 년 전 독일에서 겪은 장애를 가진 한국인 여성과의 일화를 반추한다.
한편으로는 책을 읽는다는 게 과연 즐겁고 달콤한 일인지 의문을 품기도 한다. 저자는 책 속에서 예기치 못한 기억의 단서들과 마주하면서 독서에 대한 배신감을 느낀다. 윌리엄 트레버의 <펠리시아의 여정>을 읽으며 20대 초반 잠깐 스친 사랑과 우정 사이의 감정을 떠올린다. 한쪽이 애정과 관심을 베푸는 일방적인 관계였다.
우리는 보통 ‘나의 삶’은 한 가지 모습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객관적인 관찰자가 되기도 하면서 다른 삶을 경험한다. 책에 등장하는 낯선 타인 속으로 들어가 잠시나마 그의 인생을 겪으면서 잊고 있었던 지난 기억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나의 삶은 생각보다 다양한 길을 걸어왔음을 깨닫는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 같은 깨달음을 주면서, 작가와 독자를 연결하는 편집자를 넘어 책과 현실을 잇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이금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