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이 오는 4월부터 시행 예정이던 마일리지 제도 개편계획이 여론의 반발과 정부의 시정 요구로 잠정 보류됐다. 당초 대한항공은 마일리지 공제 기준을 ‘지역’에서 ‘운항 거리’로 바꾸고, 각 등급별로 마일리지 적립률을 차등 적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장거리 노선 마일리지 혜택이 축소되는 등 ‘덜 쌓이고, 더 써야 하는’ 방식이라는 점이 부각되면서 반발이 일었다. 여론 반발에도 제도 도입을 강행할 예정이었던 대한항공은 정부와 여당까지 공세 수위를 높이자 결국 한 발 물러섰다. 제도 개편을 몇 달간 유예하고 마일리지 혜택을 다시 늘리는 수정안을 내놓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대한항공의 마일리지 제도 개편계획이 공개된 건 3년여 전이다. 대한항공은 코로나19 사태가 발발하기 전인 2019년 12월 13일 제도 개편계획을 발표했다. 당초 2021년 4월 시행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여파로 시행 시점이 2년 유예됐다. 당시에도 ‘덜 쌓이고, 더 써야 하는’ 제도 개편이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지만, 코로나19가 이런 논란을 잠재웠다.
대한항공은 마일리지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마일리지 제도 개편으로 이득을 보는 소비자가 더 많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대한항공의 이런 해명이 고객들에게 마치 ‘너희가 잘 몰라서 그렇다’는 모양새로 비치면서 사태가 악화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①‘더 쓰고 덜 쌓이는’ 마일리지 개편대한항공의 마일리제 제도 개편의 핵심은 공제 기준을 ‘지역’에서 ‘운항 거리’로 바꾼다는 것이다. 지금은 국내선 1개와 동북아와 동남아, 서남아 및 미주·구주·대양주 등 4개 국제선 지역별로 마일리지를 공제했다. 앞으로는 운항 거리에 비례해 국내선 1개와 국제선 10개로 기준을 세분화한다는 계획이다.
예를 들어 인천∼뉴욕 노선을 프레스티지석(비즈니스석)을 보너스 항공권으로 구매하려면 지금까지 편도 6만2500마일이 필요했지만, 개편안이 시행되면 9만마일이 필요하다. 반면 중거리 및 단거리 노선에서는 공제 마일리지가 줄어든다.
편도 기준으로 인천~하와이 3만5000→3만2500마일, 인천~후쿠오카 1만5000→1만 마일 등이다. 마일리지를 미국·유럽 등 장거리 노선 발권이나 좌석 승급에 사용하는 여행객들에게는 불리한 개편이다. 이코노미석을 프레스티지석이나 1등석으로 승급하는 경우에도 공제율이 높아졌다.
대한항공은 제도 개편이 대부분의 승객에게 유리하다는 논리를 펼쳐 왔다. 대한항공에 따르면 3만 마일 이하의 마일리지를 보유한 고객은 전체 스카이패스 회원의 90%에 달한다. 일반석 장거리 항공권 구매가 가능한 7만 마일 보유 고객은 4%가량으로 추정된다. 공제율이 줄어든 중·단거리 노선을 이용하는 다수의 승객에게 훨씬 유리하다는 것이 대한항공의 설명이다.
대한항공이 이 대목에서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용카드 등을 통해 마일리지를 착실히 쌓는 이른바 20~40대 ‘충성 고객’을 철저히 외면했다는 점이다. 50대 이상의 중장년층의 경우 마일리지 항공권을 구입하거나 좌석 승급을 위해 마일리지를 착실히 쌓는 경우는 많지 않다. 특히 수년간 착실히 마일리지를 모아 온 고객들을 대상으로도 기존에 적립한 마일리지 가치를 순식간에 떨어뜨리는 ‘악수’(惡手)를 뒀다는 지적이 나온다. ②제도 바꾸는 실제 이유는항공업계는 대한항공의 여론 반발에도 마일리지 개편을 강행하려고 했던 배경엔 3조원에 육박하는 마일리지 부채(이연수익)를 줄이기 위한 포석이 깔려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이연수익은 최초 매출 거래 시점의 마일리지 금액을 수익으로 환산하지 않고 마일리지 소진 시 인식되는 수익이다. 재무제표상 부채로 간주한다.
작년 3분기 별도 재무제표 기준 대한항공의 이연수익은 2조6824억원에 달한다. 2010년 말(1조739억원)과 비교해 두 배가량 증가했다. 제도 개편안을 내놓은 2019년 12월 당시 대한항공의 부채비율은 814%에 달했다. 결국 마일리지 차감률에 손을 대 부채비율을 낮추겠다는 의도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한항공은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이연수익 축소를 위해 이마트, 네이버 등과 손잡고 마일리지 사용을 독려하거나 비행 관련 기념품 등을 판매해 왔다. 하지만 이연수익을 근본적으로 줄이기 위해선 ‘더 쓰고 덜 쌓이는’ 방식의 마일리지 제도 개편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회사 안팎에서 제기돼 왔다. 이연수익을 줄이기 위해선 고객들이 자발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한 마일리지 공제율 인상이 사실상 유일한 해법이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에도 마일리지로 좌석 승급을 하거나 보너스 항공권을 구매하기는 쉽지 않았다. 항공권 구매 및 좌석승급 대상이 되는 마일리지 좌석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항공사 입장에선 당장의 이익을 위해선 마일리지보다는 현금을 받고 좌석을 판매하는 것이 이익이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은 마일리지 제도 개편을 발표하면서 마일리지 좌석 공급을 늘리겠다는 계획을 일절 내놓지 않았다. 이 때문에 대한항공이 고객 편의는 외면한 채 부채 축소를 위한 마일리지 차감에만 몰두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③고객 타이른 ‘자충수 해명’대한항공은 2019년 12월 마일리지 제도 개편 발표 이후 논란이 거세지자 이듬해 1월 홈페이지를 통해 마일리지와 관련된 ‘팩트체크’ 페이지를 열었다. 언론 등에서 제기된 논란에 대해 일절 사실이 아닐 뿐 아니라 대부분 소비자에게 유리한 제도라는 내용을 담았다. 이후 코로나19 사태가 순식간에 확산하면서 이런 논란은 금세 묻혔다.
오는 4월 시행으로 앞두고 지난달 말부터 마일리지 논란이 다시 제기되자 대한항공은 3년 전과 똑같은 방식의 대응으로 일관했다. 공식적으로는 어떤 해명도 없이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대부분 소비자에겐 유리한 제도라는 점만 강조했다.
대한항공의 이 같은 해명이 소비자들의 반발을 더욱 키웠다는 분석이 나온다. 고객들에게 마치 ‘너희가 잘 몰라서 그렇다’는 모양새로 비쳤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특히 ‘땅콩 회항’과 사주 가족의 횡포로 ‘갑질’ 이미지가 씌워진 대한항공이 이번 논란에 안이하게 대처하면서 되레 갑질 논란을 키웠다는 분석이 나온다.
마일리지 논란이 거세지자 대한항공은 뒤늦게 인기 노선인 뉴욕·LA·파리 노선에 마일리지로 예약할 수 있는 주 1~2회의 특별편을 100편 이상 투입하고, 전체 좌석의 5% 선인 마일리지 좌석 공급도 늘리는 대안을 정부에 제시했다. 하지만 대세를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는 설명이다.
강경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