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손에서 붓이 춤을 춥니다. 그 붓끝이 닿은 캔버스에서 꽃으로 만든 관이 피어납니다.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는 작업실, 화관을 쓴 모델의 손에는 트럼펫과 책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예술의 여신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다운 자태입니다. 여기에 더해 값비싼 대리석으로 장식한 바닥, 고급스러운 샹들리에와 커튼, 우아하면서도 편안한 화가의 옷, 이 모든 걸 그리는 화가 자신의 뒷모습. 내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내가 되는, 완벽한 ‘예술적 순간’이 찾아옵니다.
“으앙~!” 무아지경에 빠져 그림을 그리던 화가는 귀청을 때리는 아기 울음소리에 현실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자신이 그리고 있던 마음속 세상과 달리 집은 어지럽고, 시끄럽고, 가난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경제 위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그림이 팔린 게 언제인지도 까마득합니다. 10명이 넘는 아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배고프다며 울어댑니다. 큰 빵집을 운영하는 마음 좋은 옆집 아저씨가 빵을 외상으로 주고 돈도 빌려주지 않았다면 가족은 틀림없이 한참 전에 굶어 죽었을 겁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다잡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먹여 살릴 사람은 가장인 화가밖에 없으니까요. 가진 재주라고는 그림뿐이니, 몸이 부서지도록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그때 그 사람들’은 아이 15명을 뒀던 ‘다산왕’ 요하네스 베르메르(페르메이르, 1632~1675)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삶을 따라가며 아름다운 걸작들을 함께 소개해 보겠습니다. ‘비밀의 화가’ 베르메르
베르메르만큼 어떤 사람인지 알기 어려운 거장도 드뭅니다. 그에 대해 남아있는 제대로 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몇 안 되는 기록들도 그의 출생 신고서나 상속 관련 기록 등 딱딱한 공문서들 뿐입니다. 그래서 베르메르의 삶을 따라가려면 조금의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베르메르 연구서인 <Vermeer and His Milieu: A Web of Social History>, <Vermeer : A View of Delft> 두 권의 도움을 받아 그의 삶을 이야기로 풀어 보겠습니다.
베르메르의 삶은 평균적인 베이비붐 세대와 비슷한 부분이 많습니다. 어린 시절이 물질적으로 넉넉지 못했다는 점부터가 그렇습니다. 베르메르는 1632년 네덜란드 중서부의 도시 델프트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네덜란드 독립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을 때였습니다. 아버지는 여관 주인이었고, 어머니는 이름을 쓸 줄 몰라 공문서 서명 칸에 ‘X’를 그렸던 문맹이었습니다. 당연히 가진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아이들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할 준비가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그림에 재능을 보이는 베르메르를 교육하는 데 ‘올인’합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화가 교육을 받으려면 상당한 돈이 필요했는데, 어려운 형편에도 베르메르를 밀어준 겁니다. 당시 화가가 예술가보다 정신노동을 주로 하는 고급 기술자에 가까웠다는 점을 생각하면, 소를 팔아서 대학 보낸 것과 비슷하지요.
베르메르가 16살이던 1648년, 네덜란드가 전쟁에서 승리해 독립을 쟁취하면서 네덜란드의 고도성장기(황금기)가 시작됩니다. 자동차도, 명품도, 별다른 오락거리도 없던 때였기에 넘쳐나는 돈은 미술시장으로 몰렸습니다. 화가 교육을 받던 베르메르에게는 희소식이었습니다. 오랜 교육과정을 마친 베르메르는 21세 때(1653년) 델프트의 화가 길드(조합)에 가입하면서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합니다. “할부 되나요?” 넉넉잖은 형편 때문에 가입비를 할부로 내긴 했지만요.
같은 해 베르메르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운명의 여인’ 카타리나와 만나 결혼한 겁니다.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카타리나는 가톨릭을 믿는 돈 많은 집안의 딸이었고, 베르메르는 가진 게 하나도 없는 개신교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장모님은 이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법원 기록에 따르면 베르메르의 장인은 심각한 가정폭력범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결혼생활이 불행했던 만큼, 딸만큼은 번듯한 집안에 시집을 가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게 장모님의 바람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베르메르와 카타리나는 결국 결혼에 골인합니다. 얼마나 아내를 사랑했던지, 베르메르는 결혼하자마자 아내가 믿는 카톨릭으로 종교까지 바꿉니다. 베르메르는 결혼 후에도 아내를 많이 사랑하고 아꼈을 겁니다. 장모님이 이후 베르메르의 든든한 지원자가 된 게 증거입니다.
아버지, 베르메르결혼 이후 베르메르에 대한 기록에서 드러나는 그의 성격과 행동 특징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①가족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베르메르와 카타리나는 결혼 후 22년동안 아이를 15명이나 낳았습니다. 당시 네덜란드의 평균적인 가정에서 아이를 3~4명 낳았던 걸 생각해보면 정말 엄청난 다산이지요.
베르메르는 아내와 아이들을 정말로 사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베르메르가 남긴 작품은 고작 35점 안팎. 10명 넘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부업도 하고, 육아도 하느라 충분한 작업시간을 갖지 못한 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작품 주제 대부분도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렘브란트 등 다른 화가들이 신화나 종교를 소재로 자주 그림을 그렸던 것과 대조적입니다.
②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베르메르는 자신의 작품 대부분에 서명을 하지 않았고, 연도도 잘 표기하지 않았습니다. 일기장 같은 것도 쓰지 않았고 자신을 알리는 데도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델프트의 화가 길드 수장으로 두 번이나 선출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는데도 별다른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게 이를 증명합니다.
베르메르는 실제 생활과 자기 작품을 철저히 분리했습니다. 베르메르의 집은 항상 엉망이었고 엄청나게 시끄러웠습니다. 애가 열 명이 넘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가 죽은 뒤 집을 찾아온 빚쟁이들은 “요람, 침대, 의자가 집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베르메르의 그림에 나오는 집들은 모두 완벽하게 정리돼 있고, 조용합니다. 그림을 사 갈 만한 부유한 고객들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서인지, 어지러운 마음을 고요한 그림으로 승화한 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③ 신중했다. 베르메르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참고해 그림의 구도를 잡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일종의 원시적인 카메라로, 당시에는 혁신적인 첨단 장치였습니다. 이렇게 구도를 잡은 다음에도 그림을 굉장히 많이 고쳤습니다. 엑스레이 분석 등에 따르면 베르메르는 등장인물의 위치와 실내 인테리어 등을 자주 큰 폭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덕분에 베르메르의 그림에서는 원근법과 명암, 구도가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④ 작업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청색 물감은 청금석이라는 보석을 갈아서 만들었는데, 엄청나게 비쌌습니다. 하지만 베르메르는 자기 작품에 청색 물감을 아낌없이 썼습니다. 1672년 프랑스가 네덜란드 공화국을 침략해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이면서(프랑스-네덜란드 전쟁) 심각한 경기 침체가 네덜란드를 강타한 뒤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르메르는 가난했지만, 여전히 청색을 아낌없이 사용했습니다. ‘일하는 데에는 돈 아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전형적인 장인의 마인드죠.
평범함을 위대함으로 만들다40세가 되던 1672년 경제 위기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베르메르는 안정적으로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었습니다. 작품은 많이 그리지 못했지만 같은 도시에 사는 든든한 후원자 피터 반 루이벤과 제빵사 길드 수장이었던 헨드릭 아이앤츠 등이 그의 그림을 비싼 값에 사준 덕분입니다.
다만 이 때문에 베르메르가 유명해지지 못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작품이 시장에 많이 나와서 활발하게 거래돼야 명성이 쌓이는데, 그리기만 하면 맨날 사던 사람이 바로 구입해가는 바람에 인지도가 쌓일 틈이 없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네덜란드를 방문했던 프랑스의 한 외교관은 베르메르에 대해 “유명하긴 한데 작업실에 가보니 작품이 하나도 없더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경제 위기가 모든 걸 바꿨습니다. 당장 미술시장부터 얼어붙었습니다. 베르메르의 잘못은 아니었습니다. 얀 스테인, 윌렘 반 데 벨트 등 당시 날고 기는 네덜란드 화가들이 붓을 꺾거나, 네덜란드를 떠나거나, 파산했습니다. 하지만 베르메르에게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그림을 그려서 아이들을 먹여 살리는 수밖에 없었지요. 이 때문에 베르메르는 생활고와 스트레스, 격무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던 중 베르메르는 1675년 갑자기 43세의 젊은 나이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납니다. 뇌졸중이나 심장 마비 때문이었을 겁니다. 아내는 빚쟁이들에게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프랑스와의 전쟁 동안 그는 자기 작품을 판매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을 부양하지 못해 슬펐던 그는 좌절에 빠져 갑자기 하루 이틀 만에 건강을 잃고 죽어버렸습니다. 빚 좀 깎아주세요.” 빚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가 빵집 주인에게 진 빚은 집 한 채 값에 달했다고 합니다. 아이가 10명 넘으니 식비가 엄청나게 들었겠지요.
누구보다도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했고, 재능이 있었고, 열심히 살았고, 한 때 행복을 거머쥐었지만, 결국 시대의 파도에 휩쓸리고 만 베르메르. 죽을힘을 다해 살았는데도 그의 이름은 사후 까맣게 잊혔고, 남긴 작품 대부분은 빚을 갚기 위해 팔려나갔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죽고 어렵게 혼자 아이들을 키우다 12년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오늘날 베르메르의 자손이 살아있기는 한지, 그게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베르메르의 삶은 사실 평범한 우리네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이야 아등바등 열심히 살지만, 우리 중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금세 잊힐 겁니다. 유전자를 일부 남길 수는 있어도 무슨 날씨를 좋아했고, 어떻게 웃었는지, 주말이면 뭘 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겠죠. 언제 그런 사람이 있었냐는 듯이, 건조한 공문서들, 숫자, 아무도 들춰보지 않는 몇 줄의 기록으로만 간신히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은 평범하고 때로는 너절하지만, 결국엔 위대합니다. 베르메르의 그림 속 여인이 우유를 따르는 모습처럼요. 우유를 따르는 일 자체는 그저 하찮은 잡무일 뿐입니다. 수천 수만번 반복하는 동작이고요. 하지만 이런 평범한 일상 하나하나가 쌓여 삶을 만들고, 사회를 돌아가게 하고, 나라는 존재를 더 크고 위대한 뭔가와 연결시킵니다. 베르메르는 이런 ‘위대한 평범함’을 기막히게 포착해냈습니다. 그래서 제게 이 그림은 그 어떤 신화나 종교의 그림보다도 숭고하게 느껴집니다.
평범한 사람들을 그린 평범했던 화가 베르메르가 죽은 뒤 200년이 흘러 뒤늦게 재조명되고, 350년이 흐른 지금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영원불멸의 거장으로 기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평범하지만 위대한 일상을 응원합니다.
<vermeer :="" a="" delft="" of="" view="">
<i>*지금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레이크스 박물관)에서는 대규모의 베르메르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의 작품 중 대부분(28점)을 모은 역대 최대 전시라, 전세계 미술 애호가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2월 10일 개막해 6월 4일까지 열리지만, 안타깝게도 전시 시작 3일 만에 6월까지 표 총 45만장이 매진됐습니다. 박물관이 3월 6일 추가 티켓을 오픈할 계획이 있다고 하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달력에 꼭 적어놓으시기를 바랍니다.</i>
<i>*작품 해설은 레이크스 박물관 홈페이지의 영문 동영상 해설에서 상당 부분을 참조했습니다. 레이크스 박물관 홈페이지에 가시면 누구나 무료로 감상할 수 있으니,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꼭 한번 들어보시기를 권합니다. 네덜란드까지 가지 않고도 작품의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살펴볼 수 있습니다.</i><svg version="1.1" xmlns="http://www.w3.org/2000/svg" xmlns:xlink="http://www.w3.org/1999/xlink" x="0" y="0" viewBox="0 0 27.4 20" class="svg-quote" xml:space="preserve" style="fill:#666; display:block; width:28px; height:20px; margin-bottom:10px"><path class="st0" d="M0,12.9C0,0.2,12.4,0,12.4,0C6.7,3.2,7.8,6.2,7.5,8.5c2.8,0.4,5,2.9,5,5.9c0,3.6-2.9,5.7-5.9,5.7 C3.2,20,0,17.4,0,12.9z M14.8,12.9C14.8,0.2,27.2,0,27.2,0c-5.7,3.2-4.6,6.2-4.8,8.5c2.8,0.4,5,2.9,5,5.9c0,3.6-2.9,5.7-5.9,5.7 C18,20,14.8,17.4,14.8,12.9z"></path></svg><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