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은 절기상 봄을 알리는 입춘(立春)이었다. 사람마다 겨울을 나고 봄을 기다리는 방식이 다르다. 근대 소설가 이태준은 겨울마다 수선화 뿌리를 사다가 방 안에 두고 기르며 봄을 기다렸다. 어느 밤 문갑 위 수선화를 바라보던 그는 꽃에게는 고향(땅)을 떠나 외딴 방에서 사는 게 외로운 일이겠다는 상상을 한다. 꽃은 하늘과 새소리가 그리울 텐데 그가 꽃이 그리워서 방에 가두고 말았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사랑이란 잔인하기도 한 것”이라고 쓴다.
이태준이 1941년 출간한 수필집 <무서록>에는 이처럼 문인의 남다른 시선이 담겨 있다. 순서 혹은 질서가 없는 글이라는 뜻의 ‘무서록(無序錄)’이라는 제목처럼 여러 소재의 글을 자유롭게 묶었다. 박문서관에서 나온 초판 표지에 화가 김용준이 그린 수선화 그림이 실렸다.
16세기 프랑스 사상가 미셸 드 몽테뉴가 쓴 <에세>가 에세이라는 장르를 연 시초라면 <무서록>은 한국 수필의 대명사다. ‘돌다리’ ‘꽃나무는 심어놓고’ 등을 쓴 이태준의 탁월한 문장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산, 그는 산에만 있지 않았다. 평지에도 도시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나를 가끔 외롭게 하고 슬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모든 것은 일종의 산이었다.” 이 같은 그의 문장은 시처럼 여운이 길다.
당시 “시는 정지용, 산문은 이태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태준의 산문은 유명했다. 오죽하면 정지용이 산문집을 내면서 “남들이 시인, 시인 하는 말이 너는 못난이, 못난이 하는 소리 같아 좋지 않았다. 나도 산문을 쓰면 쓴다, 태준만치 쓰면 쓴다는 변명으로 산문 쓰기 연습으로 시험한 것이 책으로 한 권은 된다”고 했을까. 이태준이 글쓰기 강의를 하듯 쓴 <문장강화>는 요즘도 기자 준비생 사이에 글쓰기 지침서로 통한다.
이태준은 ‘문인을 발굴하는 문인’이었다. 소설가 박태원 등과 함께 문학회 ‘구인회’를 꾸리고, 조선중앙일보 문예부장으로서 신문에 문인들의 글을 실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이상의 시 ‘오감도’도 이태준 덕분에 연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한동안 국문학사에서 지워진 존재였다. 광복 후 1946년에 월북했다는 이유로 그의 책은 금서가 됐다. 문학사에서 불가피하게 언급될 때도 ‘이O준’ 또는 ‘이태O’으로 이름을 일부 가린 채 썼다. 그러나 그는 북한에서조차 숙청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막노동을 하다 병사했다는 설도 있다. 서울 성북동에는 지금도 그가 살던 한옥 ‘수연산방’이 남아있다. <무서록>에서 집 짓다가 “참으로 집 귀한 맛을 골수로 느끼다”고 쓴 바로 그곳이다. 그가 집필실로 썼다는 누마루가 특히 아름답다. 지금은 전통찻집이 됐다. 따뜻한 꽃차 한잔 마시며 <무서록>을 읽기에 제격인 공간이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