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나라’ 프랑스가 남아도는 레드 와인을 화장품 등에 쓰이는 공업용 알코올로 전환하기로 했습니다. 세계적인 와인 산지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서 레드 와인 재고가 감당이 안 될 만큼 쌓였기 때문입니다. 적게 마시는 대신 고급 와인을 고르는 소비 트렌드의 변화, 건강을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 등으로 수요가 줄며 수급 불균형이 심화된 여파입니다.프랑스 농부들 "포도밭 갈아엎겠다"8일(현지시간) AFP 통신 등에 따르면 프랑스 농업부는 레드 와인 재고 일부를 사용해 산업용 알코올로 바꾸는 데 최대 1억6000만유로(약 2169억원)를 지원하겠다고 지난 6일 발표했습니다. 2020년 코로나19 확산으로 전 세계 외식 소비가 감소했을 때 이후 처음입니다.
공업용 알코올은 화장품이나 약품을 만드는 데 사용됩니다. 일반적으로 와인은 물론 식용 알코올보다 값이 쌉니다. 남아도는 와인을 버리느니 ‘재활용’해서 조금이라도 수입을 내겠다는 거지요.
보르도 지방 농부들의 요구가 거셌습니다. 주 와인 산지인 이곳에서 생산된 와인은 많은데, 수요가 따라가지 못해 재고가 쌓이고 있다는 겁니다. 보르도 지방의 와인 생산업자들은 저장고가 가득 차 다음에 수확할 과일을 저장할 공간조차 없다고 토로합니다.
AFP통신 등에 따르면 이들은 포도밭을 갈아엎고 용도를 변경하겠다며 관련 비용 보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보르도의 와인 생산업자 디디에 쿠치니 씨는 “최소 1만5000헥타르(ha) 이상의 밭을 갈아엎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한 번 먹더라도 고급 와인으로
와인 재고가 남아도는 건 내수가 부진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와인생산총연합회에 따르면 지난해 프랑스 슈퍼마켓에서 레드와인 매출은 15% 줄었습니다.
수요 감소는 수십 년에 걸쳐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롬 데페 프랑스 농업경영자총연맹 사무총장은 70년 전 프랑스인이 한 해 평균 소비하는 와인은 130L 수준이었으나 최근 40L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프랑스 매체 더 로컬은 와인 수요 감소의 원인을 크게 세 가지 꼽았습니다. 우선 산업의 변화입니다. 70년 전만 해도 프랑스 경제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이었습니다. 많은 농부들은 점심식사를 할 때 와인을 곁들였습니다. 몸을 쓰는 일인 만큼 에너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많아지면서 사람들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오후에 사무실로 돌아가 머리를 써야 하는 사람들은 점심 식사에 와인을 먹지 않게 됐다는 겁니다.
‘취향의 고급화’도 와인 소비량을 줄였습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고 경제가 성장하면서 시민들의 소득도 높아졌죠. 고급 와인에 대한 수요도 커졌습니다.
한 번 고급화된 입맛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가성비 와인을 매일 마시는 대신 가끔 마시더라도 좋은 와인을 고르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와인을 마시는 일이 일상이 아닌 ‘만족감을 주는 행위’가 된 것이죠. 더 로컬에 따르면 1980년대에는 프랑스 성인 중 절반 이상이 매일 와인을 마셨지만, 오늘날에는 10%만이 매일 와인을 마십니다.
웰빙도 와인 소비에는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잦은 음주 또는 알코올 중독이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을 갖게 되면서 주류 소비 자체가 줄고 있다고 합니다.
와인 산업 여파는?문제는 경제입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이은 세계 2위의 와인 생산국입니다. 프랑스에서만 약 50만명의 사람들이 와인 산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와인업계에서 “현 상황을 방치하면 향후 10년간 10만~15만개의 일자리가 위협받을 것”이라는 경고가 나옵니다.
프랑스 농업부는 이번 와인 전환 지원책을 발표하면서 와인업계가 기후 변화와 달라진 소비자 동향, 수출 수요 등에 적응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대책을 연구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1950년대부터 시민들의 알코올 소비 억제책을 시행했던 프랑스 정부도 와인만은 예외로 두려 하고 있습니다. 앞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알코올 소비 억제를 위해 입법을 제안할 계획이 없다며 “(나도) 점심과 저녁에 와인을 마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노유정 기자 yjr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