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2월 08일 15:30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필자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서른 전후엔 다니고 있던 경영 컨설팅 회사의 배려로 2년 동안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대학 MBA서 공부를 했다. 신입 애널리스트부터 시작해 파트너로서 통신, 가전, 병원, 유통 등의 산업에서 여러 주제의 기업 문제 해결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때, 필자가 학부와 MBA에서 배운 경영학의 지식들은 필수적이었다.
이후 컨설팅 사를 그만두고 한 대기업 계열사에서 해외 신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했을 때, 그리고 한 스타트업에서 회사의 전략의 수립과 실행을 담당했을 때, 업무상 중요한 의사결정의 순간이라고 느껴질 때마다 경영학의 여러 과목들 즉 경영전략, 조직 행동론, 회계, 생산관리, 마케팅 수업 시간에 들은 다양한 이론들과 사례들을 떠올려보곤 했었다. MBA를 졸업할 땐 서재의 한켠을 교과서들과 수업 시간에 받은 여러 가지 종류들의 유인물, 경영사례들을 정리한 폴더들로 분류해 놓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폴더들을 다시 들춰보는 일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필자는 서재의 다른 한구석의 엉뚱한 분야 책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했다.
사례 하나.
컨설턴트로서 필자는 지난 20여년 간 수많은 해외 벤치마킹 프로젝트들에 참여했다. 1990년대 이후 한참 세계 각 지역의 시장 점유율을 높여 나가던 한국의 여러 가전 및 전자회사들, 자동차 회사들, 유통기업들은 해당 분야에서 시장 점유율이 가장 높은 회사들 또는 품질수준이 가장 우수하다고 인정받는 회사들의 기업 운영 기법들을 글로벌 경영 컨설팅 회사의 도움을 받아 가며 열정적으로 연구했었다.
고객의 시선을 한순간에 사로잡고 제품의 감성적인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하는 기발한 광고의 기법들, 객관적인 제품 성능 대비 터무니없는 가격에 제품을 팔고 있는 회사들이 회사의 충성 고객층을 만들어 내는 기법들, 수백 또는 수천 개의 부품 공급사들을 마치 하나의 회사인 것처럼 움직이게 하는 정교한 협력사 관리 사례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서구의 문화 기반에도 불구하고 직원들로 하여금 회사에 대해 한없는 충성심을 갖게 하고 열정적으로 평생 주어진 업무에 몰입하게 하는 우수 조직 운영 사례들과 기법들을 연구하고 국내에 적용하기 위해 애썼다.
간혹 좋은 제안들이 실행돼 회사들이 좋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신문기사 등을 통해 읽으면서 조용히 흐뭇해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그 좋은 정보들이 예쁜 보고서 표지와 같이 묶여 임원들의 캐비닛 안으로, 그리고 직원들의 하드디스크 속으로 들어가 영영 다시는 읽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때로 무척 허무한 심정으로 과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며 그 답을 고민해보곤 했다.
사례 둘.
언젠가 한 대기업 계열사 대표이사가 자신의 새로운 인사 정책에 대해서 설명했다. 첫 번째는 대학을 갓 졸업한 신입사원들을 뽑지 않겠다는 정책이었다. 대학이 회사가 당장 실무에서 필요로 하는 업무 기술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 현실에서, 점점 증가하는 신입사원 퇴사율을 고려할 때, 신입사원을 채용해서 일을 가르치는 데 들어가는 초기 수 년간의 비용이 불필요한 낭비라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뿐만 아니라 그 대표이사는 실무 능력이 뛰어난 정규직 직원들에게 계약직으로의 전환을 장려했다. 대표이사에 따르면 회사와 직원 간 관계의 본질은 회사가 직원의 능력을 돈으로 사는 것이기에, 능력이 출중한 직원은 계약직 전환과 함께 연봉을 올려준다는 것이다. 처음 들을 때에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인사 정책처럼 들리긴 했다. 하지만 이 정책은 암묵적으로는 회사가 해당 직원의 실무 능력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때가 오면 계약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음으로써 관계의 지속을 중단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 회사의 직원들은 대표이사 앞에서는 절대 이 새로운 인사 정책들에 대해서 긍정이든 부정이든 특정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회사를 오래 다닌 직원들은 매년 연례 행사처럼 되어오던 신입사원 채용 절차가 사라진 것에 대해서 자기들끼리 술자리에서 많이들 아쉬워했었다. 그리고 파릇파릇한 신입 사원들에게 자신들이 해오던 업무를 가르치면서 자기가 그동안 오랜 기간 관행적으로 해 오던 기존 업무들을 약간은 낯설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이제 그런 기회들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서 조용히 아쉬워했었다. 신입사원을 뽑고 이들에게 새로운 업무를 가르치는 것은 관성적으로 해오던 '사라져야 할 낭비적인 프로세스'일까? 그 대표이사가 자부심을 드러내며 말해주는 새로운 인사정책을 듣던 필자는 왠지 찜찜함을 떨쳐내지 못했다.
사례 셋.
작지만 건실한 한 제조업 회사가 있었다. 회사는 업계에서 시장 점유율이 높지는 않았지만, 사장은 큰돈을 벌 욕심을 내기보다는 안정적으로 사업을 운영하는 것에 만족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회사가 여러 해 안정적으로 이익을 만들고 조금씩이나마 성장하고 있었기에, 주변에서는 그에게 회사를 팔고 그 돈으로 여유롭게 편하게 살아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많은 돈보다는 작은 일상을 소중히 하는 그 회사의 사장은 그런 권유에 조용히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러다 한 번은 큰마음 먹고 빚을 내 들여놓은 새 장비가 오히려 기존의 장비보다 못하다는 것을 발견했고, 하필 같은 시기에 닥친 불황으로 몇 군데 중요한 거래처가 떨어져나가자, 상황을 지켜보던 채권자 중 한 명이 회사를 본인에게 매각하라고 권유하기 시작했다. 채권자는 다른 업종에서 본인 혼자 힘으로 시작한 사업이 때마침 불어온 호경기과 잘 맞아떨어져서 큰돈을 번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처음에는 강하게 거절하던 그 작은 회사의 사장은 이후에 다른 몇 가지 더 안 좋은 상황이 겹치자 자의 반 타의 반 헐값에 회사를 넘기고 어느 날 조용히 사라졌다.
새로운 사장이 된 채권자는 그 전 사장에 비해 사업에 대한 야심이 조금 강한 것뿐, 사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리 나쁜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오히려 회사 경영의 여러 측면들을 꼼꼼히 챙겼고, 때로 투자가 필요한 부분은 과감하게 투자를 해서 회사를 더 나은 회사로 키워보겠다는 생각을 가진, 어떻게 보면 더 나은 비전을 가진 의욕적인 경영자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사장에 대해 기존 직원들이 보였던 반응은 무척 의외였다. 전 사장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에 대해서 놀란 마음을 진정하기까지 수 주일의 시간이 지나고 나자, 때론 눈에 보이지 않게, 때로는 눈에 띄게 새로운 사장과 새 사장이 데리고 온 새 임원들에 대해서 적대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새 경영진은 회사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무척 관대한 새로운 복리후생 규정들을 인수 첫 달 말에 이메일로 발표했다. 또한 다가올 연말에 연봉 인상을 암시하는 공개적인 발언도 여러 차례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새 사장이 보기에 놀라운 것은, 예전의 회사가 객관적으로 볼 때 좋았던 것도 별로 없었는데도, 많은 직원들이 그 전 사장에 대한 안타까움 또는 심지어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하고, 몇몇 핵심 업무를 맡고 있던 직원들은 갑자기 사표를 내고 퇴사까지 한 것이다. 도대체 나이가 들 만큼 든 직원들이 글로벌 경쟁 시대에 전혀 비합리적인, 무엇보다 비경제적인 그리고 무척이나 감정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놀랍고 이해가 되지 않을 따름이었다. 이런 직원들의 이상한 반응은 어떻게 설명이 될 수 있을까?
필자는 위 세 사례 이외에도 다양한 경영 컨설팅 경험들을 하면서 경영학의 합리적인 분석 틀은 분명 조직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진단하고 개선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도구임에 분명하지만, 경영학의 그 합리성에 기반한 분석 툴로 설명되지 않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그 무엇인가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경험적으로 깨닫았다.
필자는 경영학을 통해 회사에서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나 제안의 가치를 평가할 때는, 그 새 제안을 실행할 때 발생할 비용 대비 잠재적 효용성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경영전략에서는 소위 '비용편익분석(Cost-Benefit Analysis)'이라는 전문용어를 쓰기도 한다. 새 마케팅 정책은 비용 대비해서 더 많은 매출을 만들어야 하고, 새 인사 정책은 인건비를 줄일 수 있어야 한다. 회사의 새 비전과 전략은 회사의 성장 속도를 높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엑셀 파일을 하나 만들어서 그곳에 새 아이디어의 비용과 효용을 집계하고 이의 크기를 비교만 하면 모든 기업이 성공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필자는 경영학의 이론을 넘어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들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가 어느 조직에서 실행되려면, 조직이 이미 갖고 있는 맥락 또는 호흡이 정작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직의 맥락과 호흡은, 회사를 오래 다녀본 경험이 없는 경영 컨설턴트들이나 새로 회사를 인수한 새 경영진들이 감각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성질의 것들이다. 그것은 비용편익분석 엑셀파일에 정량적인 데이터 형태로 입력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의미다.
그것은 회사 기존 경영진들과 직원들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추상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단단한 조직의 정체성일 수도 있고, 또는 기존 회사의 주요 직원들 누구도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내지는 못하고 회사의 공식 문서로 작성되어 있지도 않지만, 그간에 일어난 일련의 회사 내부의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직원들의 무의식에 각인된 행동 범위의 심리적 경계선일 수도 있다. 또는 어떤 경우에는 회사가 새로운 일을 추진할 때마다 회사가 암묵적으로 시행해왔던 온갖 구체적인 제례의식, 통과의례 의식인 경우도 있다.
인간이 만드는 조직이라면 어디나 다 갖고 있는 이런 조직의 맥락과 호흡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파악할 수 있을까? 이런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조직의 상황들이 몇 개의 패턴으로 정리해 설명이 가능한 사안이긴 한 것일까?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우리 인류의 현재를 단 한마디로 정리했듯이, 우리는 석기시대의 마음과 중세 시대의 제도를 갖고 신과 같은 기술로 스타워즈 문명을 구축하고 있다. 조직을 구성하는 인간의 합리성뿐만 아니라 충동적이고 무계획적인 본성을 통합적으로 고려한 '통섭적' 경영 컨설팅이 필요한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