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구형 아이폰의 성능을 고의로 떨어뜨렸다며 국내 소비자들이 집단 손해배상 소송을 냈으나 1심에서 패소했다. 미국 등 해외에서 제기된 똑같은 소송에서 소비자들이 수천억원의 합의금을 받아낸 것과 대조적인 결과다. 法 “이익도 있어 피해라 단정 못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1부(부장판사 김지숙)는 2일 소비자 9850명이 애플코리아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병합된 사건까지 더하면 원고는 6만2000여 명, 청구금액은 127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집단소송이었다.
일명 ‘배터리 게이트’로 알려진 이 사건은 2017년 12월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일부 소비자가 아이폰 운영체제(iOS)를 업데이트한 뒤 아이폰6시리즈와 7시리즈, SE 모델의 성능이 눈에 띄게 저하됐다는 불만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소비자들은 애플이 신형 아이폰 판매를 늘리기 위해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로 구형 아이폰의 성능을 떨어뜨린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애플은 공지문을 통해 “해당 업데이트에는 예기치 않게 전원이 꺼지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작업 부하가 최고치에 이를 시 전력 관리를 향상시키는 조치가 포함돼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성능 저하를 인정한 셈이었으나, 새 제품 구매를 유도하려는 조치는 아니라고 부인한 것이다. 소비자들은 2018년 3월 1인당 2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소비자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성능 저하는 사용자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생각을 기재한 것에 불과해 그대로 믿긴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원고들은 미국 정보기술(IT) 평가 사이트에서 성능 실험을 한 결과, 업데이트로 인해 아이폰 성능이 이전보다 40~88% 수준으로 저하됐다고 주장했다”면서도 “그러나 이 실험이 어떤 조건에서 진행된 것인지, 어떤 부분이 어떻게 저하된 것인지 구체적인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했다. 객관적 증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전원이 예기치 않게 꺼지는 것보다 성능이 일부 제한되더라도 꺼지지 않는 것이 더 유용할 수 있어 반드시 사용자에게 손해를 가져온다고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신형 휴대폰 판매를 늘리기 위한 애플의 고의적 성능 저하라는 주장에도 “신형 모델의 구매를 유도하고자 했다면 아이폰6 시리즈보다 먼저 출시된 모델에도 해당 업데이트를 배포했어야 한다”고 했다. 애플, 美에선 6000억원대 합의 사인해당 업데이트 이후 한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국가에서 소비자 집단소송이 잇달았다. 미국에서는 대규모 소비자 소송이 시작됐고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등 34개 주정부도 애플을 상대로 행정적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애플은 2020년 3월 구형 아이폰 사용자 한 명당 25달러(약 3만400원)씩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합의금은 최대 5억달러(약 6000억원)로 추산됐다. 애플은 같은 해 11월 행정당국에도 총 1억1300만달러(약 1375억원)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칠레에서도 지난해 4월 소비자 약 15만 명에게 총 25억페소(약 38억원)를 배상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재판부는 애플이 다른 국가에서는 합의를 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분쟁을 조기 종결시키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애플의 경영적 판단이 들어가 있다”며 “합의 결정문에도 업데이트로 인한 결함이나 위법행위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취지의 기록이 들어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국내 소비자 1885명은 작년 3월 ‘삼성전자가 게임 앱 작동 시 발열을 잡기 위해 갤럭시S22 성능을 고의로 저하시켰다’고 주장하며 1인당 3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제기했다.
오현아 기자 5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