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나고 대한민국 모든 행정기관이 마비됩니다. 이럴 때 당신은 하필 소설가입니다. 세상에 이름을 알리지도 못했죠. 서울 용산의 지하 벙커에서 유엔 심사관에게 사정을 해봅니다. 다른 나라로 피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심사관은 말합니다. “외국으로 가려면 당신의 이름이 박힌 판매용 소설책을 갖고 와서 작가라는 사실을 증명하세요.” 이런 상황에 처한 이기호의 단편소설 ‘수인(囚人)’ 속 주인공은 심사관의 말을 듣자마자 광화문으로 향합니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교보문고지요.
1981년 6월 1일 개장한 광화문 교보문고는 서점의 대명사입니다. 하루 평균 4만 명이 45만 권의 장서를 모아놓은 이곳을 찾습니다. 단일층 기준으로 국내 최대 규모(6674㎡)를 자랑합니다. 연면적 기준으로는 교보문고 강남점이 조금 더 큽니다만 상징성은 광화문점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광화문 교보문고의 주소는 서울 종로구 종로 1입니다. 주소만 보더라도 얼마나 좋은 땅인지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땅에 서점이라니요. 1980년 교보생명빌딩 완공 당시 회사 내부에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컸습니다. ‘(수익성이 좋은) 상가를 들여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죠. 논쟁을 잠재운 사람은 교보생명 창립자인 고(故) 신용호 회장이었습니다. 어려서 잦은 병치레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신 회장은 책을 통해 배움을 얻었습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교보문고 입구에 새겨진 문장에는 신 회장의 소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 비싼 땅에 돈 못 버는 서점이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삼성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도 이곳을 아꼈죠. 이 회장은 교보문고 개점식에 직접 참석해 신 회장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내가 하지 못한 일을 친구인 신 회장이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죠. 1997년 말 외환위기 때 국제통화기금(IMF) 관계자가 이곳에 우연히 들렀다가 많은 젊은이가 책을 읽고 있는 걸 보고 “이 나라는 분명히 다시 일어난다”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이런 역사 덕분에 교보문고는 지난해 ‘서울 미래유산’ 중 하나로 지정됐습니다.
물론 오랜 전통은 변화를 고민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인터넷에서 책을 주문하면 다음 날이면 배송되는 시대. ‘초대형 오프라인 서점’은 교보문고의 유산이자 숙제입니다. 최근 광화문점을 리모델링해 스타벅스를 입점시키고 전시 공간을 꾸린 건 ‘이불 속에서 유튜브를 보는 대신에 기꺼이 찾아와 머물고 싶은 공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죠.
교보문고의 책장을 누비다 보면 이런 궁금증도 생깁니다. 이곳에서 지금까지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대체 뭘까요. 전산망에서 판매량 자료를 확인 가능한 2000년 이후 누적 판매량 1위는 파울로 코엘료의 장편소설 <연금술사>라고 하네요.
이곳에서 책 향기에 취했다면 기분 탓이 아닙니다. 교보문고는 매장 전용 방향제로 유칼립투스, 편백나무 향을 녹인 ‘더 센트 오브 페이지’를 개발해 사용 중입니다. 구매할 수 있냐는 고객 문의가 빗발치자 결국 디퓨저 등을 제작해 판매 중입니다.
교보문고가 있는 건물 외벽의 ‘광화문 글판’도 유명합니다. 계절마다 새로운 시·노래 구절을 전하며 시민들에게 잔잔한 위로와 응원을 건넵니다. 요즘엔 이런 문장이 걸려 있어요. “너에게는 내가 잘 어울린다/우리는 손을 잡고 어둠을 헤엄치고/빛속을 걷는다.”(진은영 시 ‘어울린다’ 중에서)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