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5번기는 인공지능(AI)이라는 단어를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그동안 공상과학(SF) 소설에서나 그려진 AI가 인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알파고 이후 AI는 일상 용어로 자리 잡았지만 인간의 삶을 바꾸지는 못했다. 음성 AI 비서는 여전히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챗봇 고객센터를 이용하다 보면 사람의 목소리가 간절해지기도 한다. 그동안 AI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좀 모자라지만 잘 봐줘야 하는 착한 친구’ 수준에 머물렀다.
알파고 이후 7년여 만에 ‘게임 체인저’라고 할 만한 AI가 등장했다. 바로 ‘챗GPT’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창업자가 세운 오픈AI는 작년 11월 챗GPT의 연구용 프리뷰 버전을 공개했다. 사용법도 쉽다. 사이트에 접속해 질문이나 요구사항을 텍스트로 입력하면 곧장 답한다. 기능 자체는 이전에 나온 챗봇과 다를 바 없다. 차이점은 결과물이다. 전문가가 썼다고 해도 손색없는 수준의 보고서를 작성하는가 하면 시를 짓기도 한다.
전에 없던 성능의 AI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다. 챗GPT의 하루 사용자는 출시 1주일 만에 100만 명을 넘어선 데 이어 최근 15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26일 오전 한때 접속이 막히기도 했다.
미국에선 챗GPT를 활용해 과제를 내는 일도 빈번해졌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면서 오픈AI는 챗GPT로 작성한 글을 가려내기 위한 AI도 개발하기로 했다.
챗GPT뿐만이 아니다. 텍스트는 물론 그림, 음악을 수준급으로 만들어내는 AI가 잇달아 등장하고 있다. 처음으로 인간이 아닌 기계가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대를 불시에 맞이한 것이다.詩 짓고 소설 쓰는 챗GPT…인간 창작 영역까지 넘본다
정보 제공 특화된 '챗GPT'…세상 뒤바꿀 '게임 체인저'챗GPT는 오픈AI의 생성 인공지능(AI) GPT-3를 개량한 GPT-3.5를 기반으로 만들었다. 기계가 인간 언어를 이해하고 구사할 수 있도록 하는 대규모 언어 모델(LLM)의 대표적 사례다. LLM은 단어를 조합해 나오는 문장 가운데 자연스러운 문장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통계학적 모델이다. GPT는 학습한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간과 비슷한 문장을 써 내려간다. GPT-3의 파라미터(매개변수)는 1750억 개에 이른다. 파라미터는 인간 뇌의 ‘시냅스’(신경세포의 접합부)에 해당하는 역할을 하는데 숫자가 클수록 성능도 높다. 이르면 올해 출시할 것으로 예상되는 GPT-4는 파라미터 100조 개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챗GPT 등장으로 AI 적용 빨라질 것”챗GPT의 등장은 정보기술(IT)업계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전망이다. 당장 구글이 20년 가까이 왕좌를 차지해 온 검색시장이 첫 번째 격전지로 떠올랐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지난 23일 챗GPT를 만든 오픈AI에 추가 투자를 결정했다. 구체적인 투자 규모는 밝히지 않았지만, 수년간 총 100억달러(약 12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자사 클라우드 서비스 ‘애저’에 오픈AI의 다양한 기술을 도입할 예정이다. 오피스 프로그램에서 자동으로 글을 써줄 수 있고, 발표 주제에 맞는 그림을 만들어줄 수도 있게 된다.
가장 크게 관심을 끈 것은 마이크로소프트의 검색 엔진 ‘빙’에 챗GPT를 도입하기로 한 점이다. 그동안의 검색 서비스는 원하는 키워드를 입력해 유사성이 높은 웹페이지 링크를 차례대로 보여주는 게 핵심이었다. 하지만 챗GPT는 웹사이트를 보여주는 대신 이용자의 질문에 곧바로 정답을 제시한다. 원하는 내용을 찾기 위해 검색 서비스가 제시한 수많은 링크를 일일이 클릭하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되는 셈이다. 구글도 마이크로소프트의 이 같은 움직임을 경계하며 대책 마련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에선 챗GPT의 등장으로 기업의 AI 적용 속도가 빨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 한 IT 기업 관계자는 “챗GPT처럼 기존의 AI와 비교해 활용법이 단순하고 결과물도 좋은 AI가 등장한다면 큰 거부감 없이 도입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거짓 정보 확산 우려도텍스트를 만들어주는 챗GPT는 물론 그림, 음악을 창작하는 생성 AI도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오픈AI가 개발한 달리2(Dall-E2), 미드저니 AI연구소의 미드저니, 스테빌리티AI의 스테이블 디퓨전 등 딥러닝 방식의 이미지 생성 AI가 최근 잇따라 등장했다. 특히 미드저니가 만든 작품이 한 미술 대회에서 디지털 아트 부문 1위를 차지하면서 논란이 됐다. 국내 게임업계의 1세대 일러스트레이터로 손꼽히는 김형태 시프트업 대표는 최근 이미지 생성 AI에 대해 “30여 년의 그림 공부가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나는 충격과 경외감, 놀라움은 물론 그림을 만들어 내는 원초적인 재미를 동시에 느꼈다”며 “이 흐름은 ‘없었던 일’이 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생성 AI가 장밋빛 미래만을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 당장 미국에선 챗GPT를 과제 작성에 활용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 때문에 뉴욕과 시애틀의 일부 공립학교는 학교에서 챗GPT 접속을 금지했다. 네이처지는 챗GPT와 같은 도구를 논문에 사용할 경우 명시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기도 했다.
AI가 생성한 글을 통해 거짓 정보가 오갈 수 있다는 점도 걱정거리다. AI는 온라인 웹사이트와 뉴스, 블로그 게시물 등의 데이터를 학습하는데 이곳의 정보 가운데 잘못된 내용이 섞여 있을 수도 있어서다. AP에 따르면 챗GPT가 허위로 판명된 정보를 사실인 것처럼 글을 쓴 사례를 찾아볼 수 있었다. AP는 “AI 도구는 산업을 재편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지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거짓말과 프로파간다를 하려는 사람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고 꼬집었다.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