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새해 벽두부터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띄우자 정치권에서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윤 대통령은 언론 인터뷰에서 “소선거구제는 전부 아니면 전무로 가다 보니 선거가 너무 치열해져 진영이 양극화되고 갈등이 깊어졌다”며 “중대선거구제를 통해 대표성을 좀 더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현행법상 선거구는 선거 1년 전까지 확정해야 한다. 차기 22대 총선은 내년 4월 10일 실시된다. 이 때문에 국회 정치개혁특위는 오는 2~3월 복수의 선거제 개편안을 만든 뒤 각 당의 의견을 수렴해 최종 결론을 낸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여의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선거제 개편 문제는 같은 당 내에서도 의견이 천차만별이다. 각 당 지도부 내에서도 다른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중대선거구제를 실시하되 농촌 지역에서는 기존 소선구제를 유지하는 도농복합선거구제 도입 주장도 나온다.
중대선거구제를 적용하면 지금의 소선거구제를 기준으로 하는 지역구는 훨씬 넓어진다. 지역구 수는 대폭 줄어들되 한 지역구에서 복수의 의원들이 뽑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현재 지역구 의원들은 불리할 수밖에 없다. 같은 당이라도 통폐합 대상이 되는 인근 지역구 의원들 간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해진다. 일률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큰 틀에서 보면 각 당의 텃밭은 불리하고 험지에선 유리해진다. 국민의힘 텃밭으로 여겨지는 영남 지역에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진입 장벽이 낮아지고 호남에서 반대가 된다. 이 때문에 영남에선 국민의힘 의원들이 반대하고 있다. 2015년 당시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이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가정해 시뮬레이션했을 때 영남에서 의석 40%를 잃고 호남에서는 4%만 얻는 것으로 나타났다.
호남에선 민주당 의원들이 반대하고 있다. 수도권에선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민주당이 국민의힘보다 더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중대선거구제가 도입되면 국민의힘이 더 유리해질 수 있지만 지역구 의원과 소속 정당이 자주 바뀌는 대표적인 ‘스윙보터’ 지역이어서 항상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다. 각 당 내에서도 중구난방…22대 총선 적용 어려워국민의힘의 경우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은 “소선거구제의 폐해를 절감하고 있지만 중대선거구제의 문제점은 우리가 잘 모르고 있다”며 반대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명확한 의견을 밝이지 않고 있다. 그는 “대단히 복잡한 여러 문제를 포함하고 있고 지역구마다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합의에 이르기 쉽지 않다. 당리당략과 유불리를 버리고 한국 정치의 올바른 방향이 어디에 있는지만 보고 방향을 정해 가면 될 듯하다”며 원론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다.
민주당은 전반적으로 신중론을 보이고 있다. 수도권 의석수를 늘리는 데 실익이 없다고 보고 있다. 이재명 대표는“제3 선택이 가능한 정치 시스템이 바람직하고 그 방식이 중대선거구제여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김성환 정책위원회 의장은 “중대선거구제는 거대 양당이 나눠 먹기를 하기에도 훨씬 편리한 제도”라면서도 윤 대통령의 중대선거구제 개편 발언 의도에 대해선 국민 심판 여론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구심을 제기했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국회에서 전원위원회를 열고 국회의원 300명 중 200명만 찬성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 낸다면 한 달이면 되지 않겠느냐”며 강력한 추진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의원들마나 중구난방이어서 논의가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에 좌초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중대선거구제 도입 취지는 지역주의를 근거로 한 거대 양당 체제의 폐해를 극복하자는 것이다. 현행 소선거구제는 정국 안정을 꾀할 수 있는 반면 승자 독식으로 인해 민심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지역주의를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 지 오래다. 표심을 제대로 의석으로 반영하지 못해 대표성 문제를 낳고 승자 독식과 진영 갈등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득표율 51% 대 49%로 당락이 갈릴 경우 49%의 민의는 완전히 배제되는 단점이 있다. 2020년 21대 총선 때 국민의힘은 영남에서 55.9%를 득표했지만 의석은 86.2%를 가져갔다. 민주당은 호남에서 68.5%의 득표로 의석은 96.4%를 차지했다. 거대 양당이 정치판을 좌우하면서 다음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상대 당을 무조건 부정하는 ‘비토크라시(vetocracy : 거부 민주주의)’ 현상이 심화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하지만 중대선거구가 소선거구제로 인한 이런 폐단들을 없앨 수 있느냐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한 선거구에 2~4명을 뽑아 유권자의 선택의 범위가 넓고 사표를 방지할 수 있으며 고질적인 지역주의를 완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해 6·1 지방선거 때 6개 지역 30개 기초의원 선거구에서 중대선거구제를 시범 실시한 결과 당선된 109명 가운데 국민의힘과 민주당 양당 소속 당선자가 105명으로 96.3%를 차지했다. 소수 정당 소속은 4명에 불과했다. 대구에선 2곳 선거구에서 국민의힘이 7석을, 민주당은 나머지 2자리를 가져간 반면 광주의 3곳 선거구에선 민주당이 6명, 정의당 1명, 진보당 2명이었고 국민의힘 당선자는 한 명도 없었다. 특정 정당 쏠림 현상이 여전한 것이다.
거대 정당 후보자들 중 공천을 받지 못할 경우 대거 무소속으로 출마한다면 특정 진영이 독식하면서 소수 정당이 오히려 발을 붙이기 어렵고 지역주의 완화도 기대할 수 없다. 한 선거구에 같은 정당에서 여러 명을 공천하는 것으로 결정할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했던 5공화국 때 여당의 2, 3중대 정당이 출현한 경험도 있다. 21대 총선 때 거대 양당 독식을 막고 다당제를 실현하겠다며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다가 위성 정당을 낳은 폐단이 다시 발생할 수도 있다.지역 대표성 약화·득표율 격차 커 표 등가성 문제도지역구 수가 대폭 줄어들면서 각 정당 공천 과정에서 계파 간 다툼이 심화할 가능성도 높다. 지역구 평균 인구수가 80만 명 정도로 늘어나면서 지역 대표성도 약화된다. 지역이 넓다 보니 유권자와의 소통도 힘들어진다. 후보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선명성 경쟁에 따른 포퓰리즘 공약이 난무할 가능성도 있다. 득표율 10% 정도로도 당선될 수 있는데 50%를 득표한 후보와 등가성 문제가 있다. 어느 정당도 과반을 차지하기 힘들고 군소 정당 난립으로 정치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소수 정당이 연정(聯政)을 무기로 정치판을 흔드는 역(逆)표심 왜곡도 우려된다. 후보자가 너무 많아 유권자들에게 혼선을 주고 선거 비용이 많이 든다는 단점도 있다. 일본이 1994년 중선거구제를 없애고 소선거구제와 비례제 혼합형으로 전환한 이유들이다. 중대선거구제를 실시하기 위해선 현역 의원들이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하는 등 현실적인 장애물도 만만치 않다. 의원들의 이해관계를 다 반영하면 제도가 비틀어져 정치 발전에 독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석패율제나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으로 소선거구제의 단점을 보완하는 수준에서 그치자는 주장도 나온다. 석패율제는 특정 정당이 취약한 지역의 선거에서 낙선한 후보를 비례대표로 구제해 주는 것으로 지역주의를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 전국을 몇개 권역으로 나눠 인구 비례에 따라 의석수를 배정한 뒤 그 의석을 정당 득표율에 따라 배분하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도 마찬가지 효과를 노린 것이다.
홍영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