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중근 의사와 동지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등장한다. 대한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다 같이 네 번째 손가락을 자르는 투사들. 뮤지컬 ‘영웅’의 막을 여는 명장면이다. 붉은 피로 물든 손수건과 웅장한 분위기의 넘버(노래) ‘단지동맹’이 관객을 압도한다.
#. 영화 ‘영웅’에서도 손가락을 희생하며 독립의 의지를 불사르는 모습이 가장 첫 부분에 등장한다. 단지동맹의 배경이 된 자작나무 숲을 영화 특유의 방대하고 사실감 있는 규모로 표현했다. 새하얀 눈밭 위에 독립군들의 피와 붉은 해가 동시에 퍼지면서 대비를 이룬다.
국내 창작뮤지컬의 신화와도 같은 ‘영웅’과 그 뮤지컬을 원작으로 탄생한 영화 ‘영웅’이 지난달 21일 동시에 공개됐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다룬 뮤지컬은 2009년 초연됐다. 이후로 수차례 재연, 미국 뉴욕에서도 공연하는 등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 ‘국제시장’ 등으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윤제균 감독은 뮤지컬을 보고 감동받아 영화 제작에 나섰다. 국내 창작 뮤지컬을 영화화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티켓값을 감안한 최고의 가성비는 뮤지컬일까 영화일까. 안중근의 인간적 면모 부각
영화 ‘영웅’이 뮤지컬과 가장 크게 대비되는 부분은 원작의 캐릭터와 서사가 일부 영화적 화법으로 보강된 점이다. 주인공 안중근 의사를 연기하는 배우 정성화는 뮤지컬과 영화에 동일하게 등장하지만, 영화에선 의사의 인간적인 모습이 더 강조된다. 영화에는 뮤지컬엔 없던 ‘회령전투’ 장면이 추가됐는데, 전쟁포로를 놓아줬다가 결과적으로 우리 독립군이 큰 피해를 입는 안중근의 과거 장면이다.
그가 전쟁에서 실패하며 내적으로 갈등하는 장면을 비롯해 독립운동을 걱정하는 가족과의 일화 등은 뮤지컬에선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영화는 그의 대한의병군 참모중장으로서의 모습뿐 아니라 남편이자 동료로서의 인간적인 모습을 동시에 부각하면서 서사를 쌓아나간다.
음악도 영화에선 빠지거나 새롭게 추가된 넘버(노래)들이 있다. 뮤지컬은 총 31곡의 넘버로 구성됐다. 안중근이 사형을 선고받는 재판장에서 부르는 ‘누가 죄인인가’를 비롯해 유명한 넘버들이 많다. 영화는 이 중 16곡을 생략하고, 뮤지컬엔 없는 1곡을 추가해 총 16곡을 부른다. 송스루(대사가 거의 없고 노래만으로 진행되는 형식)에 어색함을 느끼는 관객을 위해 노래와 대사를 절반 비중으로 구성했다는 설명이다. 영화에서 추가된 넘버 하나는 설희(배우 김고은 분)가 부르는 ‘그대 향한 나의 꿈’이다. 조국을 되찾기 위한 설희의 간절한 마음을 드러내는 곡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야망을 드러내는 연회장에서 다른 인물들이 멈춰진 순간에 설희 혼자 살아 움직이며 부르는 장면이다. 윤제균 감독이 직접 가사를 썼다.
추격 장면과 기차 장면 등 뮤지컬의 명장면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구현됐는지를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 안중근과 동지들이 일본 경찰에게 쫓기는 장면은 ‘영웅’의 주요 장면 중 하나다. 뮤지컬에선 앙상블들이 무대 위에 마치 미로처럼 디자인된 거대한 철골 구조물 사이를 뛰어다니는 것으로 연출됐다. 대담하고도 절도 있는 군무와 움직임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장면이다. 영화에선 안중근이 건물 지붕을 뛰어다니는 모습이나 망루에서 동지들을 위해 저격 실력을 뽐내는 모습 등이 추가돼 더 역동적이다.
이토 히로부미와 설희를 싣고 하얼빈 역으로 향하는 기차 장면도 뮤지컬의 명장면 중 하나다. 달리는 기차 모습이 영상으로 표현되다가 순식간에 실물로 전환되는 무대 연출이 인상적이다. 영화에선 이 기차 배경이 더욱 현실감 있게 묘사되지만, 무대 특유의 독특한 연출을 찾아보긴 어렵다.
원작 뮤지컬을 제작하고 영화 기획에도 참여한 윤홍선 에이콤 대표는 “뮤지컬은 무대에서 열연하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배우의 호흡과 몸짓을 현장에서 직접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면서도 “영화에선 확장된 스케일과 화려함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영화를 본 관객 중 뮤지컬을 예매한 경우도 많다”고 덧붙였다. 같은 영웅, 다른 영웅
영화 ‘영웅’은 뮤지컬보다 더 웃기고, 더 슬프다. 원작의 진중함에 ‘윤제균식 유머코드’가 첨가됐다. 안중근을 돕는 독립군 우덕순(배우 조재윤 분) 조도선(배정남 분) 유동하(이현우 분) 마진주(박진주 분) 등의 유머러스한 캐릭터가 감초 역할을 하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다. 안중근에게도 중간중간 유머 코드를 넣었다. 다만 이들 모두가 극의 흐름과 완전히 맞아떨어지느냐에 대해선 물음표가 찍힌다. 진지한 장면에서의 몰입을 다소 방해하는 측면도 있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를 맡은 배우 나문희의 연기는 영화의 ‘백미’ 중 하나다. 안중근이 사형 집행을 당하기 전 조 여사가 부르는 넘버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는 뮤지컬에서도 명장면으로 꼽힌다. 영화에선 넘버와 더불어 나문희의 디테일한 연기가 어우러져 감정선을 극대화한다. 영화 속 이 장면에서 눈물을 닦는 관객이 많다.
노래와 춤이 주가 되는 장르적 특성상 뮤지컬 영화가 뮤지컬의 현장성을 그대로 따라가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오로지 작품성만 따진다면 뮤지컬이냐, 영화냐의 판정에서 뮤지컬의 손을 들게 되는 이유다. 배우들이 스크린 속에서 대사를 하다가 갑자기 노래로 넘어가는 연결 고리가 영화에선 다소 어색하다. 조잡한 특수 효과 처리가 곁들어진 배경은 수준이 높지 않은 뮤직비디오를 연상케 한다. 물론 접근성과 티켓 가격 등을 고려하면 영화의 압승이겠지만.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