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겪고 있는 에너지 대란 폐해는 유럽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유럽향(向)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하자 미국 공영라디오방송 NPR이 이 같이 보도했다. 유럽연합(EU)이 에너지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기 위해 액화천연가스(LNG) 등의 수입을 대폭 늘리면서 개발도상국·저개발국까지 에너지 확보전에 휘말리고 있다는 설명이다.◆겨울만 기다린 푸틴의 에너지 무기화월스트리트저널(WSJ)은 11일(현지시간) "미국과 EU가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로 디젤과 중유 등 정제 유류제품의 가격 상한을 설정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과 EU는 러시아산 원유에 대해선 이미 지난달부터 가격 상한제를 시행하고 있다. EU는 내달부터 천연가스 가격에도 상한제를 도입한다. 이와 별개로 정제 유류제품 가격 상한제까지 더해지면 러시아의 전쟁 비용 조달창구인 에너지 산업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개전 이후 러시아의 풍부한 에너지 자원 매장량을 무기로 활용했다. 서방의 제재안에 맞서기 위해서다. 재작년까지 EU의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 비중은 40%에 달했다. 이에 러시아는 작년 9월 EU로 자국산 가스를 실어나르는 송유관 노르트스트림을 닫아버렸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은 한달 뒤 원유 감산 결정을 내렸다. OPEC+ 회원국인 러시아를 돕기 위해서다.
당시 "푸틴은 겨울이 오기만을 기다린다"는 분석이 쏟아졌다. 겨울철 혹한기에 난방 수요가 급격히 늘면 에너지 가격이 더욱 치솟고 결국 EU가 제재안을 철회할 것이란 판단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에너지 대란 공포감에 나무 땔감 등을 구입하는 유럽인들도 급증했다.◆치솟는 에너지費에 가계·기업 모두 울상
유럽의 지난해 기준 주거용 가스 및 전기 비용은 2000~2019년 평균치보다 각각 144%, 78%씩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코노미스트는 이와 관련해 "우크라이나 전쟁 도중 총칼에 맞아 사망하는 군인보다 푸틴의 에너지 무기화로 사망하는 민간인이 더 많아질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다행히 이번 겨울 푸틴식 에너지 무기화의 위력은 심각하지 않았다. 기온이 평년보다 따뜻한 데다 EU가 천연가스 비축량을 89% 가량 채워두는 걸로 대비한 덕분이다. 하지만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작년 10월 "올해는 어떻게든 버티지만 2023년 3월 이후엔 에너지 상황을 장담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에너지 대란은 기업 환경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값싸고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이 제조환경의 입지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유럽의 불안정한 에너지 상황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 미국의 경제 내셔널리즘, 보호주의 등과 맞물려 유럽 기업들의 탈(脫)유럽, 유럽의 탈산업화를 촉발시켰다"고 진단했다.◆에너지 넘어선 핵심 광물 무기화비상이 걸린 유럽이 LNG 등 수입을 늘리면서 에너지 쟁탈전이 본격화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LNG는 원래 한국과 일본, 중국 등 동북아 국가들의 수입 에너지원이란 점에서다. 싱크탱크 뉴아메리칸시큐리티의 에너지 전문가 레이첼 지엠바는 "지난 6개월간 시장에 나온 LNG를 사실상 유럽이 싹쓸이했다"며 "유럽의 가세는 국가들 간 가스 입찰전쟁을 촉발시켰고 결국 더 가난한 나라들은 가스 접근권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상황으로 인해 아시아 국가들의 에너지 공급망도 불안정해졌다"고 전했다. 애틀랜틱카운슬 산하 글로벌 에너지 센터의 올가 카코바는 "푸틴의 에너지 무기화가 전 세계로 확산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에너지뿐만 아니라 자원 전반의 무기화 현상을 우려하는 전망도 잇따른다.
최근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20세기가 석유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었다면 21세기는 핵심 광물에 관한 싸움으로 번질 것"이라며 "특히 러시아가 에너지 자원을 무기로 활용하는 것을 지켜본 중국으로선 서방의 제재에 대한 보복 수단으로 희토류와 흑연 등 더 많은 선택지를 고려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니켈과 리튬, 코발트 등 2차 전지 핵심 자원 보유국인 인도네시아와 아르헨티나, 칠레 등 일각에선 '광물판 OPEC'을 결성해 생산량 및 가격 담합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