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에게 우월적 거래상 지위를 이용해 '갑질'을 지속한 미국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이 200억원의 상생기금을 조성하겠다는 자진 시정안을 내놨다. 매년 1조원어치에 가까운 부품을 구매하도록 하고, 구매금액 미달 시에는 차액을 배상하도록 했던 것에 비하면 상생기금 규모가 적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브로드컴과의 협의를 거쳐 마련한 잠정 동의의결안을 공개하면서 의견 수렴 절차를 시작한다고 9일 밝혔다. 동의의결은 공정위 조사·심의를 받는 사업자가 스스로 피해 구제 등 타당한 시정 방안을 제시하면 위법 여부를 확정하지 않고 사건을 신속 종결하는 제도다.
브로드컴은 삼성전자에 스마트폰 핵심 부품을 판매하면서 우월한 거래상 지위를 남용해 3년간의 장기계약을 강요한 혐의로 공정위 조사를 받았다.
삼성전자가 브로드컴의 부품을 매년 7억6000만달러어치(1조원 상당) 이상 구매하고, 미달하면 차액을 배상한다는 것이 계약의 주된 내용. 갤럭시Z플립3, 갤럭시S22 등 지난해 3월 이전 출시된 스마트기기에 브로드컴의 관련 부품이 들어갔다.
이에 공정위는 거래상 지위 남용 혐의로 브로드컴을 조사했고, 브로드컴은 자발적으로 동의의결 절차 개시를 신청했다. 공정위는 브로드컴과 약 130일간 구체적 시정 방안을 협의해왔다.
잠정 동의의결안에서 브로드컴은 반도체 분야 상생을 위한 기금 200억원을 조성하고 향후 5년간 반도체 전문인력 양성(77억원), 중소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회사) 기업 창업·성장 지원(123억원)에 쓰이도록 하겠다고 제시했다.
반도체 인재양성센터(가칭)를 설립해 매년 150명씩 총 750명의 국내 대학생·대학원생, 재직자에게 2주∼2달 안팎의 반도체 데이터 수집·분석 또는 차량용 반도체 설계 교육을 제공하고, 중소 팹리스 기업을 위한 창업 지원 인프라와 검증·테스트 환경 구축을 5년간 지원하는 내용이다.
삼성전자에 대해서는 장기계약 기간(2020년 3월∼2021년 7월)에 주문이 이뤄진 브로드컴 부품에 대해 3년간 품질 보증과 기술지원을 제공하고, 삼성전자의 부품 주문 및 기술지원 요청에 대해 유사한 상황의 다른 거래 상대방과 같은 수준으로 응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아울러 브로드컴은 국내 스마트기기 제조사에 부품 선적·구매주문 승인·기술지원·생산을 중단하는 등 불공정한 방법으로 부품 공급계약 체결을 강제하지 않고, 부품 선택권을 제한하지 않으며, 자신의 경쟁 사업자와 거래하지 않도록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독립적인 공정거래 컴플라이언스(법규 준수) 감독관을 임명·운용하고 동의의결 시정방안 추적 시스템 구축하는 한편, 최고경영자(CEO) 등 임직원을 대상으로 준법 교육을 하고 공정거래법 위반 등에 대해 익명으로 질의·신고할 수 있는 사내 절차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오는 10일부터 다음달 18일까지 이해관계인과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등 관계부처의 의견을 수렴한 뒤 이를 반영해 최종 동의의결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규정에 따라 검찰총장과는 서면으로 협의를 진행한다.
향후 공정위가 최종 동의의결안을 의결해 확정하면 브로드컴은 시정명령, 과징금 등 공정위 제재를 피할 수 있게 된다. 법 위반 여부를 확정하지 않은 채 일종의 면죄부를 받는 셈이다.
일각에선 브로드컴이 제시한 상생기금 규모가 기대에 못 미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과거에는 네이버(2014년·1000억원)와 애플(2021년·1000억원) 등이 동의의결 제도를 통해 상생기금을 조성한 바 있다.
김은지 한경닷컴 기자 eunin1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