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과의사가 수술을 연습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카데바(시신), 실험동물은 물론이고 실험전용 냉동고와 냉장고, 멸균장비까지 필요하다. 실습이 끝난 카데바는 위탁업체에 소각을 부탁해야 한다. 기증받을 수 있는 카데바에는 한계가 있고, 이 모든 과정은 복잡할뿐 아니라 비용도 많이 든다.
아주 정교한 VR(가상현실) 장비와 프로그램이 있다면 어떨까. 가상세계에 시신 모델을 만들어놓고, 외과의의 손가락 움직임을 인지할 수 있는 입력 장비, 수술 과정에서 느껴지는 촉감을 전달할 수 있는 출력 장비가 있다면? 카데바 없이도 필요한 만큼 연습할 수 있고, 복잡한 과정과 비용도 필요 없다. 한번 구축한 가상세계를 조금씩 변주해 얼마든지 다양한 상황의 수술을 구현할 수 있다.
VR·AR(증강현실)은 ‘오락’을 넘어 다양한 산업 현장에 활용되고 있다. 8일(현지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막을 내린 ‘CES 2023’에는 다양한 VR·AR 솔루션이 등장했다. 위기 상황 대처법을 교육하거나, 실제 장비를 활용하면 위험하고 값비싼 직무 훈련을 대신하기도 한다.
작업 정확도까지 데이터로 보여줘미국 기업 ‘햅트X’의 타겟 고객은 제조업 등에서 직업 훈련이 필요한 기업이다. 자동차나 선박 제조업, 외과 수술 등에서 가상 훈련을 하는데 쓰는 목적이다. 실물로 훈련하려면 진짜 자동차 프레임, 해부용 시신 등이 필요하지만 가상세계에선 모델만 구현하면 된다.
실제 훈련보다 돈이 적게 들고, 안전하게 위기 상황을 시험해볼 수 있다는 게 장점. 또 한 번 가상세계를 만들어 놓으면 향후 적은 비용으로 모델을 조금 수정해 다양한 상황에서 훈련을 할 수 있다. 자동차 디자인에도 쓰인다. 일본의 자동차 기업인 닛산은 차 내부를 디자인한 후, 햅트X의 장갑을 사용해 디자인 시안을 체험해본다.
제이크 루빈 햅트X CEO는 “실제 모델은 비싸고, 한번 쓰고 나면 더 쓸 수도 없고, 기존의 VR 컨트롤러는 너무 부자연스러워 사실적인 피드백이 어렵다”며 “햅트X 장갑을 사용하면 디자인 과정 내내 디자이너가 차량 모델을 실제적으로 체험하고, 빠르게 디자인을 고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상세계에선 현실세계보다 쉽게 데이터를 모을 수 있다. 훈련 과정을 수치화해 평가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인도 기업 ‘아즈나렌즈’는 성과까지 정확히 측정하는 직업훈련용 VR 기기와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스프레이 페인팅 기술을 훈련한다면, VR 훈련과정에서 참가자가 얼마나 정확한 각도로 고르게 페인트를 분사했는지, 낭비된 페인트는 얼마인지 등이 점수로 환산된다. 이 데이터를 보고 훈련자는 자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 수 있고, 평가자는 직원 평가나 선발에 활용할 수 있다.
실제로 체험하기엔 너무 위험한 위기상황을 체험하고, 대비할 수도 있다. 한국의 기업 ‘메타에듀시스’는 VR 교육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학생들이 사고의 당사자 입장에서 화재 대응, 선박 사고 대응, 생존 수영 등을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에 온도를 활용한 VR 장갑을 선보인 기업 ‘테그웨이’와 합작해 현실감을 높였다. 이 장갑을 착용하면 화재현장 속 불길의 뜨거움, 물에 빠졌을 때 바다의 차가움을 느낄 수 있다. 열전소자로 즉시 온도를 높이고 낮춰 현실감을 높이는 기술이 핵심이다.
택배 쳐다만 보면 QR코드 인식...AR글래스현실세계에 가상세계를 덧입혀 보여주는 AR 기술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업무에서 활용도가 높다. 한때 구글, 알리바바 등이 투자한 곳으로 이름을 알린 미국 기업 ‘매직리프(Magic leap)’가 대표적이다. 이곳은 창업 7년 만인 2018년 첫 AR 기기를 출시했지만 미온적인 소비자 반응에 B2B로 방향을 틀었다. 최근에 출시한 AR 글래스 ‘매직리프 2’는 병원 수술실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의료기기 국제기준 인증(IEC 60601)을 세계 최초로 받았다.
매직리프는 이번 CES에서 6개 협력사와 함께 참가해 AR글래스 활용법을 소개했다. 협력사 ‘아브리오’는 매직리프2를 활용해 재난 상황 대응법을 구상하는 솔루션을 선보였다. 데모에선 올해 심각한 가뭄으로 수위가 낮아진 후버댐의 3D모델을 구현했다.
정부·기업 관계자들이 AR 글래스를 통해 이 모델 속에 들어가 소방차, 구급차, 소방관, 중장비 등 다양한 자원을 어떻게 배치하고 움직일 것인지 논의할 수 있다. 아브리오의 제이슨 테리엔 박사는 “VR이 아닌 AR을 활용하면, 가상 모델을 실감나게 보는 동시에 주변에 내가 대화하는 동료들도 볼 수 있다”며 “상호소통이 필요한 업무에 AR이 적합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미국 ‘뷰직스(Vuzix)’의 AR 글래스는 안경처럼 착용하는 스마트폰 역할을 한다. 물류업, 제조업 노동자가 자유롭게 손을 사용하면서, 시선만으로 스마트폰 기능을 활용할 수 있다. 뷰직스의 AR글래스 ‘M400’은 와이파이, 블루투스 기능과 카메라가 들어있는 웨어러블 화상 장비다. 물류창고를 정리하는 작업자라면, 별다른 조작 없이도 AR 글래스로 내가 픽업해야 하는 물건을 응시하면 물건에 적힌 QR코드가 인식된다. 안경 화면에는 이 물건을 어디로 옮겨야 하는지가 바로 표시된다.
라스베이거스=최예린 기자 rambut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