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IT·가전 박람회 ‘CES 2023’은 글로벌 기술 패권 전쟁의 실상을 여실히 드러낸 무대였다. 정보통신기술(ICT)과 결합한 모빌리티 산업의 끝없는 진화, 실생활 깊숙이 파고든 인공지능(AI)과 생활로봇, 디지털 헬스, 메타버스까지 미래 산업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산업 융합과 이업종 간 결합의 최전방 격전지가 된 모빌리티는 올해도 CES의 주역 중 하나였다. 자동차 관련 부스는 300여 곳에 달했고, 전체 전시관 규모도 작년보다 25% 넓어졌다. 후발업체들은 ‘똑똑한’ 전기차를 내세우며 테슬라 등 선발업체와의 전쟁을 예고했다. BMW는 운전자와 대화하고 차량 색상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카멜레온 전기차를, 소니는 게임·영화·음악·가상현실을 즐길 수 있는 자율주행 전기차를 각각 공개했다. 아마존과 구글 등 빅테크 업체들도 경쟁에 뛰어들어 산업 간 영역이 허물어지는 빅블러(Big Blur) 시대를 실감케 했다. 가상현실에서 꽃 냄새를 맡고 오토바이를 타며 바람을 느끼는 수준까지 온 메타버스, 장애물을 피해 목적지를 찾아가는 자율배송 로봇은 생활 혁명의 예고편이었다. AI, 사물인터넷(IoT)과 결합한 디지털 헬스케어는 원격·자가 진료의 신세계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세상은 어지러울 정도로 급변하고 있는데, 국내 현실을 보면 암담하다. 우버·타다에 이어 로톡(법률서비스 중개) 택스테크(세무회계) 프롭테크(부동산 기술) 등 각 분야의 혁신 서비스가 기득권의 편에 선 정치권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고 있다. 원격진료와 드론 등 신기술·신산업을 옭아매는 낡은 규제 사슬은 여전히 견고하다. 정부가 아무리 규제 혁파를 외쳐도 중앙 부처의 3배에 달하는 지방자치단체의 풀뿌리 규제 탓에 산업 현장에선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만 ‘우물 안 개구리 신세’인 것 같은 느낌이다.
올해 CES에서 역대 최대인 3000여 개 기업이 신기술 향연을 펼친 것은 불황의 돌파구를 미래 기술에서 찾으려는 욕구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그중 한국 기업이 550여 곳으로 미국에 이어 두 번째 많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융합과 혁신에 뒤처지면 도태할 것이라는 절박함 속에 도전에 나선 기업들이 그만큼 많았다. 이런 기업들이 마음 놓고 투자와 혁신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규제 혁파와 세제·금융 지원 등으로 판을 깔아주는 것은 정부와 정치권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