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3일 연구개발(R&D)의 심장인 남양연구소에서 그룹 신년회를 열어 “자동차회사지만 어떤 전자기업보다도 치밀하고 꼼꼼한 조직문화를 조성하자”고 주문했다. 코로나19 이후 3년 만에 오프라인으로 열린 이번 신년회는 정 회장의 제안으로 그룹 수뇌부와 남양연구소 임직원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타운홀 미팅 형식으로 진행됐다. 경기 침체에 지정학적 리스크까지 고조되는 복합위기 속에서 생존을 위해 조직문화의 혁신을 이끌겠다는 정 회장의 의지로 풀이된다. “치밀한 제품 위해 문화 변해야”
신년회에서 정 회장은 편한 복장을 하고 직원들 앞에서 신년사를 발표했다. 정 회장은 단상에 올라 “올해를 신뢰 구축과 도약의 시기로 삼자”고 당부했다.
그는 조직문화 개선을 당부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전자기업과 조직문화를 비교하면서 현대차그룹의 변화를 콕 집어 주문했다. 정 회장은 “물이 고이면 썩는 것처럼 변화를 멈추면 쉽게 오염된다”며 “결과에 대한 두려움 없이 새롭게 시도할 수 있는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 차 한 대에 200~300개 들어가는 반도체가 자율주행차 시대엔 2000개 이상으로 늘어난다”며 “자동차 제조회사지만 전자회사보다 더 치밀해지고 꼼꼼해져야 하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정 회장은 “(자동차 기업으로서) 우리만의 과감한 문화가 있지만, 전자회사들은 치밀한 문화가 있다”며 “우리에게 없는 문화는 우리가 조성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저는 어떤 전자회사나 정보통신기술(ICT)기업보다 치밀한 융합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정 회장은 “능력이 존중받고 원칙이 바로 서는 일터를 위해 지속적인 상시 인사를 시행하겠다”며 “변화무쌍한 조직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도록 제도적인 뒷받침을 하겠다”고 말했다.
직원과 타운홀 미팅 신년회 ‘파격’이날 신년회는 여러모로 파격적인 형식으로 진행됐다. 정 회장의 발표가 끝난 뒤 장재훈 현대차 사장과 송호성 기아 사장, 박정국 그룹 연구개발본부 사장과 송창현 차량소프트웨어담당 사장이 단상에 올랐다. 사장들은 각자가 맡은 분야의 한 해 전략을 설명한 뒤 정 회장과 함께 직원들의 질문을 받았다. 장 사장이 사회를 보면서 행사를 진행했다. 정 회장과 사장단이 함께 직원들과 신년 타운홀 미팅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 회장은 MZ세대(밀레니얼+Z세대) 직원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저는 쉰 살이 넘었지만 MZ세대일 때가 있었다”며 “그때는 쉽게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듣기만 해야 하는 시기였지만 세상이 바뀌었고, 적극적으로 들으며 반영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현대차그룹 특유의 경직된 ‘보고 문화’도 꼬집었다. 정 회장은 과거 자신이 부친인 정몽구 명예회장에게 보고하던 방식을 예로 들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결론을 먼저 얘기한 뒤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데, 어떤 직원은 자신의 생각과 결론 없이 상사에게 A·B·C 세 가지를 주고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며 “자신의 생각과 결론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박정국 사장은 “ICT기업 등 어떤 경쟁자도 쉽게 따라오지 못하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단순히 직원들의 실패를 용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실패가 권리가 되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한신/김형규 기자 p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