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대 잡은 광고맨…엔딩크레딧에 대한 갈증으로 글 썼죠

입력 2023-01-01 16:54
수정 2023-01-01 23:55

2023 한경 신춘문예 스토리 부문 1등에 당선된 이동영 씨(52)의 습관은 영상을 노래처럼 틀어놓는 것. 그는 “책을 읽든, 글을 쓰든 방에는 늘 드라마나 영화를 켜놓는다”며 “방해가 되면 소리를 음소거로 죽이더라도 영상을 끄지는 않는다”고 했다.

새로운 영상과 이미지에 대한 감각이 곤두서 있어야 하는 광고업계에 25년간 몸담으며 생긴 버릇이다. 그가 과거 제일기획 프로듀서로 일하며 만든 ‘애니콜’ 광고는 칸 광고제 동상을 받기도 했다. 이씨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잡아끄는 이야기를 찾는 데 익숙하다. 그가 ‘인생 2막’을 꿈꾸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는 “엔딩 크레딧에 대한 갈증도 컸다”고 털어놨다. 엔딩 크레딧은 영화가 끝난 직후 스크린을 통해 감독, 배우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막을 말한다. “광고 하는 사람들도 매우 많은 고생과 갈등 끝에 결과물을 내놓거든요. 그런데 이름 한 줄 남지 않잖아요. 거기에 대해 아쉬움이 어쩔 수 없이 있죠.”

당선작인 드라마 시나리오 ‘미인(美人)’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화장품 ‘박가분’을 만드는 여성들의 꿈과 도전을 그렸다. 그는 “광고 일을 할 때 아모레퍼시픽 등 K뷰티 관련 작업도 한 적이 있다”며 “한국 화장품 기업과 산업에 드라마가 있다고 생각했고, 이걸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바라보면 더욱 극적일 것이라 판단했다”고 했다. 1920년대 서양의 ‘양분’, 일본의 ‘왜분’을 몰아낸 박가분을 처음 만든 사람은 두산그룹 창업자 박승직 회장의 부인 정정숙 여사다. 아모레퍼시픽은 과거 약장수가 장터에서 북을 치며 ‘동동구리무’를 팔던 화장품 판매 방식을 집마다 찾아가는 방문판매로 바꾸며 급성장했다.

이씨는 “한국 최초 근대 화장품이라는 모티프만 따오고 나머지 인물과 서사는 허구”라며 “하지만 시대상을 고증하기 위해 당시 신문기사와 신문에 낸 화장품 광고, 회사 연감 등 자료조사에 공을 들였다”고 말했다.

‘미인’은 그가 처음 완성해 응모한 시나리오다. 방송작가 아카데미 같은 전문교육기관에서 시나리오 작법을 배운 적도 없어 대본집을 찾아 읽으며 형식을 익혔다. 처음 소재를 떠올린 것은 2015년. 광고 일이 바빠 집필을 시작하지 못했다. 2020년 광고제작사를 정리하고 전업 투자자로 살면서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뛰어들었다. 그는 “광고 일을 하며 하나 익힌 건 ‘성실한 영혼에 성실한 창의력이 깃든다’는 것”이라며 “매일 주식시장이 열리니 일과가 규칙적이라 꾸준히 글을 쓸 수 있었다”고 웃었다.

첫 응모에서 1등을 거머쥐었지만 그는 들뜬 기색이 없었다. 담담하게 “저도 또 다른 공모전이나 기회에서는 고배를 마실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선택을 바라는 순간을 피할 수 없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누군가의 전화를 기다려야 할 때가 있겠죠. 이번에 시나리오를 제출하고 스스로에게 말했어요. ‘이번에 떨어져도 굴하지 말고 새로운 글을 하나하나 응모해보자.’ 트리트먼트(기획안)를 써놓은 것만 20~30개가 있어요. 추리, 무협, 스릴러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계속 써보려고 합니다.” "나 혼자만의 상상으로 채운 작품, 세상에 알릴 기회 잡아"
2023 한경 신춘문예 당선 통보를 받고나는 느린 시간의 동네에 산다.

몇 해 전, 몸에 익은 오랜 밥벌이를 정리한 후부터 부쩍 느려진 시간은, 북적이는 은행 앞 사거리를 지나 버스 정류장 앞에서 드문드문한 숨을 몰아쉬다가 아파트와 오피스텔로 가득 채워진 내 방 창문 밖에 가만히 앉아 하루를 보낸다. 언제부터인가 시간이 되돌려지는 일도 잦아졌는데, 그것 역시 내 마음을 비추는 우리 동네만의 일이었다. 시간이 느려질수록 마음은 빼곡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오랜 친구인 글쓰기에 기대어 우리 둘만의 세계를 만들어 왔다. 우리는 의미 있고 아름다운 글에 대해 서로 묻고 대답하며 함께 소망했고 그 순간만큼은 비로소 일상이 꿈을 지나는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은 그렇게 만들어온 나의 세계가 처음으로 받은 영예로운 평가이고 새로운 무대를 향하는 이름표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에 비밀을 말하듯이 나 혼자만의 기대와 상상으로 채운 작품을 기쁜 마음으로 세상에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과 한국경제신문에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린다.

더불어, 언제나 단단한 응원과 지지로 나를 지켜준 가족들과 오랜 친구들에게도 지면을 빌려 마음 깊은 사랑을 전한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