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토끼의 해' 계묘년입니다. 해가 바뀌었지만 국토교통부 수장인 원희룡 장관의 어깨는 무겁습니다. 연초부터 해결해야 할 난제가 첩첩이라서 입니다.
건설·교통 산업과 부동산 정책을 이끌고 있는 국토부엔 어느 때보다 막중한 책무가 놓여있습니다. 무엇보다 경색 국면인 부동산 시장부터 살펴야 합니다. 최근 수년간 '부동산 불패'라는 용어가 자주 오르내렸습니다. '부동산 불패'는 신화처럼 여겨졌고, 주택 가치의 상승을 믿고 공격적으로 구매에 나선 '영끌(영혼까지 끌어 모아 대출)족'이 대거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유례없던 초저금리가 끝나고 본격적인 금리 인상이 시작되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시중은행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연 7%대 후반까지 뛰었고, 불어난 대출 이자 부담에 부동산 시장은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가 됐습니다. 경기 둔화 우려까지 맞물려 부동산 시장 하향 조정 전망이 확산했고, 치솟던 집 값은 하루가 달리 곤두박질쳤습니다. 견고했던 '강남 불패'마저 흔들리게 됐습니다.
매매 시장이 얼어붙자 전세 시장도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전세 매물이 역대 최대 규모로 쌓이면서 전세가 동반 하락에 따른 역전세난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입주를 앞둔 수분양자들은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각에선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극심한 거래 절벽'이라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정부가 여느 때와 다르게 대출 규제 폐지와 규제 지역 완화 등 부동산 시장 충격을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집값이 떨어지고 거래가 얼어붙었다는 데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부동산 시장의 향배가 올해 한국 경제를 뒤흔드는 '태풍의 핵'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 집값 급락이 이어진다면, 건설 등 부동산 관련 기업과 금융회사에까지 연쇄적인 충격을 미칠 것이란 이유에서입니다. 결국 실물 경기와 금융 시스템까지 마비시킬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이미 신호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건설사들의 부도설이 끊이지 않고, 금융회사들은 서둘러 건설 산업에 대한 돈줄을 죄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말부터 전세 사기가 큰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빌라와 오피스텔 등 주택 1100여채를 사들여 전세 사기를 벌이다가 숨진 이른바 '빌라 왕' 사건이 알려지면서 사회 초년생, 신혼부부 등 무주택 세입자 수천명의 피해 사실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피해 금액만 1600억원에 달하는 초유의 전세 사기에 대한 정부의 지원·재발 방지 대책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지난해 유난히 잦았던 열차 사고도 과제입니다. 고속철도(KTX)의 열차 바퀴가 빠져 탈선하거나 수서고속철도(SRT)의 전기공급 차단 장애로 운행이 중단되는 일이 잇따랐습니다. 오봉역 사망 사고, 영등포역 무궁화호 탈선 등 중대 사고 이후에도 연이어 열차 장애와 운행 지연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정부 안팎에선 국가 철도의 유지 보수와 차량 정비, 관제의 총체적인 문제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이에 따른 안전 진단 체계 정비와 철도 산업 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5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경기 과천 제2경인고속도로 방음터널 화재 관련 전국의 방음터널도 전수 조사 중입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집값, 소득, 고용 등 핵심 민생지표들이 고의로 왜곡됐다는 통계 조작 의혹도 현재 진행형인 문제입니다. 이미 원 장관은 "정책 결정의 근거가 되는 통계가 왜곡되면 국가 정책이 왜곡되고, 그 결과는 국민의 고통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철저한 진상 규명 의지를 밝힌 상황입니다. 국민의 주거와 직결되고 대다수 국민의 자산을 차지하는 부동산 관련 통계의 경우 더욱 투명성이 확보돼야 한다는 판단입니다.
사실 취임 첫해 원 장관의 성적표는 좋은 편입니다. 지난해 5월 취임한 원 장관은 올 1월로 취임 8개월째를 맞았습니다. 특유의 조직 장악력과 이슈 돌파력으로 단기간에 국토부 수장 자리에 적응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특히 지난해 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의 총파업 땐 과감하게 업무개시명령을 내리고, 원칙에 따라 행정 조치에 나서는 등 지휘 체계를 제대로 작동시켜 산업 피해를 줄였다는 게 중론입니다.
건설노조와 전면전을 선포한 것도 좋은 평가를 이끌어냈습니다. 건설노조는 건설 현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시공사들을 압박해왔습니다. 소규모 집회나 공사 방해 뿐만 아니라 태업, 채용 강요 등도 이뤄졌습니다. 이에 원 장관은 건설 현장의 월례비나 채용 강요 등을 포함해 건설노조의 불법 행위에 강경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국내 주택 시장에서만 치고받고 있는 건설사들의 해외 진출 활로를 열어줬다는 점에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대다수 대형 건설사들은 부동산 시장 활황기와 맞물려 손쉽게 수익을 낼 수 있는 국내 주택 시장에만 몰두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건설사들의 해외 수주 실적은 쪼그라들었고, 건설사별로 사업 포트폴리오에 차별성이 사라지면서 건설 산업 자체의 성장성과 잠재력까지 움츠러들었습니다.
다른 국토부 수장들이 건설 산업 재편에 무심했던 것과 달리 원 장관은 취임 직후부터 해외 건설 수주 확대에 공을 들였습니다. 건설사들에만 맡기는 게 아니라 관계 부처와 유관 기관이 모두 함께 참여하는 '원팀' 개념을 도입해 해외 수주를 발굴하고 패키지로 수주할 수 있는 시스템적인 진출 전략을 세웠습니다. 이런 노력은 대규모 프로젝트를 발주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한국 기업 간 수십건의 업무 협약을 체결하는 성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건설 업계 한 원로는 "국토부 장관이라는 위치가 웬만하면 질타와 비난을 받기 십상인데다 잘해도 본전인 어려운 자리"라면서 "올해도 산적한 각종 건설, 교통, 부동산 이슈에 민첩하게 대응하고 해결에 적극 나선다면 '일 잘하는 국토부 수장'이라는 이례적인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은정 기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