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 중앙은행이 금 매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올 들어 3분기까지 금 매입량은 55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지정학적 리스크와 정치적 역학관계에 따라 불확실성이 커지는 달러 대신 금 투자를 늘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금괴 쌓는 세계 중앙은행
파이낸셜타임스(FT)는 세계금협회(WGC) 자료를 인용해 “세계 중앙은행과 금융회사들이 올해 1~3분기 금 673t을 순매수했다”며 “이는 1967년 이후 55년 만에 가장 큰 수요”라고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1967년은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하기 전 유럽 등지의 은행들이 금 매수량을 늘리던 시기다. WGC에 따르면 지난 3분기 매수량만 400t으로 분기별 집계가 시작된 2000년 후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러시아와 중국이 특히 금 매수에 열을 올렸다는 추측이 나온다. 미국과 적대적 관계인 이들 국가가 미국 달러를 대체할 수 있는 안전자산인 금을 확보하는 데 집중했다는 분석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서방의 제재로 중앙은행이 보유한 달러 자산이 동결되자, 달러 대신 금으로 눈을 돌렸다.
중국 인민은행은 지난달에만 금 32t을 사들였다고 발표했다. 약 18억달러(약 2조원)어치다. 하지만 업계에선 중국이 최소 200t은 사들였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귀금속 거래 업체 MKS PAMP의 니키 실스 애널리스트는 “중국 인민은행이 32t만 구매했다면 지난달 금 가격이 트로이온스당 75달러 정도 하락했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달 금 가격이 상승세를 탔던 것을 감안하면 중국의 실제 금 매입량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란 얘기다.
금 가격은 최근 트로이온스당 1800달러 선을 회복했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달러가 강세였던 시기에는 금 가격이 하락했다가 최근 수요가 늘며 반등했다는 분석이다. 금 가격이 올랐어도 각국 중앙은행의 수요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프랑스 투자은행(IB) 나틱시스의 버나드 다흐 수석애널리스트는 “지정학적 긴장과 탈세계화로 달러 의존도를 낮추려는 비(非)서방국의 ‘금 사자’가 앞으로 최소 10년 동안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킹달러 힘 잃나내년에도 달러 강세가 이어질지 여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달러 가치 하락을 점치는 전문가들은 미국 인플레이션이 둔화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Fed가 기준금리 인상 속도 조절에 나서면 달러 가치 상승폭도 제한될 것이란 예상이다.
킹달러(달러 초강세) 현상은 최근 둔화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주요 1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WSJ 달러지수는 올해 들어 28일까지 8.9% 상승하며 2014년 후 최대 상승폭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 지수는 지난 9월 27일 105.14로 연고점을 찍은 뒤 상승분의 절반가량을 반납했다.
달러 강세가 주춤해지면서 주요국 통화 가치는 반등했다. 9월 27일 이후 28일까지 영국 파운드화와 한국 원화 가치는 달러 대비 12% 가까이 상승했다. 유로와 노르웨이 크로네, 스웨덴 크로나, 일본 엔화 등도 약세에서 벗어났다.
헤지펀드 유라이즌 SLJ 캐피털의 스티븐 젠 최고경영자(CEO)는 “미국 인플레이션이 둔화하고, 시장이 미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에 집중하면 내년 달러 가치는 10~15% 하락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달러 강세가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JP모간은 “내년 달러 가치가 5% 추가 상승할 수 있다”며 “경기침체 위험이 커지면 달러 가치도 오를 수 있다”고 했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