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종영했다. 사실과 허구가 잘 버무려져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있는 순양그룹 사람들의 이야기가 현대사를 배경으로 흥미진진하게 전개됐다. 드라마 후반부 순양그룹의 최대 관심사는 ‘금융지주회사’ 출범이었다. ‘금산분리’ 규제가 완화되면 금융지주회사를 통해 그룹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경영권 승계 구조가 짜였다가, 정권이 바뀌고 규제 완화가 무산되면서 이야기는 다음 소재로 넘어갔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살짝 시비를 가려보자면 우리나라에서 ‘재벌집 막내아들’과 같은 금융지주회사 출현은 말도 안 된다. 일단 순양그룹의 금융지주회사 밑에는 금융회사와 비금융회사가 섞여 있어 드라마 속 시대에도 현재도 공정거래법에 의해 불법이다. 더구나 금산분리 같은 묵직한 규제의 완화에 대한 기대만으로 일을 추진할 무모한 재벌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 금융위원장의 취임 일성이 금산분리 규제 완화였고 지금도 꾸준히 추진되고 있기 때문에 그 금산분리와 이 금산분리는 다른 것인가, 그건 완화되면 안 되고 이건 완화돼도 되는 것인가 혼란스러울 수 있다.
금산분리는 금융과 산업의 분리를 뜻한다. 여기서 분리란 일단 주식 보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금융회사가 비금융회사의 주식을 갖는 것이 제한되고, 비금융회사가 은행의 주식을 갖는 것이 제한된다. 연장선상에서 금융지주회사는 금융회사 주식만 가져야 하고, 일반지주회사는 금융회사 주식을 가질 수 없다. 그런데 주식 보유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보유한 주식에 대한 권리 행사가 제한되기도 하고, 금융회사가 비금융 업무를 하는 것도 제한된다. 금융업은 인가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아 비금융회사가 금융 업무를 하는 것이 어려운 건 물론이다. 미국에서 은행이 비금융회사와 지분으로 엮이는 것을 막는 법이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은행 외의 금융회사까지 비금융회사와 갈라놓는 나라는 필자가 알기엔 없다.
그것은 한국 금산분리의 상당 부분이 재벌 규제이고, 우리나라는 재벌 규제에 꽤 진심이기 때문이다. 특히 계열사들이 그룹 안에서 주식을 소유하면서 각 회사의 이익만이 아니라 그룹 차원의 이익이나 총수의 이익을 추구할 가능성이 극도로 경계됐다. 지난 십수 년간 금산분리가 명분으로 내세워지긴 했지만 사실은 재벌 견제로 규제가 더해져 계열사 간 보유한 주식을 팔도록 하고 그럼에도 보유한 주식은 의결권을 제한하도록 했다. 그런 재벌 규제에는 공정거래법이 주축이고, 공정거래법에서 정한 지주회사 내의 금산분리도 재벌 규제의 맥락이다. 은행법 등 각 금융업법과 금융산업의 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 등에도 금산분리를 보조하는 내용이 있다. 순양금융지주회사 출범은 그래서 불가능하다.
전방위적인 금산분리 규제는 기술과 산업 환경이 변하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재벌이 은행을 갖지 못하도록 비금융회사가 은행 주식을 갖는 것을 제한하던 규정은 카카오뱅크 같은 인터넷전문은행이 성장하면서 완화됐다.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플랫폼을 통한 거래가 늘면서 비금융회사의 금융 서비스도 같이 증가했다. 금융위원회가 추진하는 금산분리 완화는 주로 은행이 할 수 있는 업무 범위를 확대하는 방향이다. 은행이 통신 사업을 영위하고 배달앱을 운영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기존 금융회사도 플랫폼으로 성장하고 빅테크와 경쟁해 궁극적으로 국민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려는 것인 한편, 은행이 재벌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비교적 안전하게 추진될 수 있는 것이다.
드라마 속 순양금융지주회사가 무산되고 강산이 두 번 가까이 바뀌어간다. 네이버나 카카오 등이 신(新)재벌이 됐고, 얼마 전 카카오는 금산분리 위반으로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 조치도 받았다. 위반이냐 아니냐를 떠나 카카오가 ‘찐’ 재벌로 인정받은 셈이다. 금융과 산업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재벌도 바뀌는데, 법은 시대를 못 쫓아가고 있다. 그때는 안 됐어도 지금은 될 법 한데 말이다. 사실은 법을 바꾸는 사람들의 재벌 규제에 대한 사고방식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새해에는 변화의 조짐이라도 볼 수 있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