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두고 ‘아날로그 대국’ ‘갈라파고스’라는 비아냥이 따라붙곤 한다. 정보기술(IT) 변화에 둔감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본에서도 디지털 대전환(DX)은 업종을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 일본에서 DX 움직임을 주도하는 대기업으론 히타치제작소를 꼽을 수 있다. 광산용 모터를 개발하는 회사에서 출발한 점에 착안해 ‘모터의 히타치’로 불릴 정도로 전통 제조업체 이미지가 짙었지만 최근 DX를 통해 제조업 중심의 사업모델을 통째로 바꾸고 있다. 산업 인프라 전문 기업에서 기업 디지털화를 지원하는 디지털 솔루션 기업으로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거인’ 히타치의 변신은 400조엔(약 3816조원) 규모로 예상되는 DX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조치로 분석된다.
히타치는 작년 말 미국 IT 물류 대기업 글로벌로직스를 1조엔에 인수했다. 일본 제조업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M&A)이었다. 글로벌로직스는 물류산업 디지털화를 지원하는 기업이다. 글로벌로직스 인수로 히타치는 주력사업인 산업 인프라에 IT를 접목할 수 있게 됐다.
히타치는 철도와 엘리베이터, 전원 설비 등 다양한 산업 인프라 사업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기업의 추격으로 하드웨어를 판매하는 사업만으로는 수익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됐다. 독일 지멘스와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 같은 경쟁업체들이 제조업에 디지털을 접목해 소프트웨어 기업화해나가는 추세에 뒤처진다는 위기감도 컸다.
글로벌로직스를 계열사로 거느림에 따라 히타치는 DX를 추진하는 기업에 컨설팅부터 설비, 시스템 구축, 운영, 유지·보수까지 일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 히타치는 이미 이탈리아 제노바시의 공공 교통기관 요금 정산 시스템, 북미 지역 송전망 유지·보수 사업, BMW의 커넥티드카 시스템 개발 사업 등을 따내며 성과를 올리고 있다.
이처럼 서둘러서 ‘DX 갑옷’을 입는 것은 뼈아픈 구조조정을 마무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히타치는 2008년 당시 일본 제조업 사상 최대 규모인 7873억엔의 적자를 냈다. 기록적인 적자를 계기로 히타치는 22개에 달했던 상장 자회사를 모두 정리하는 사업 재편을 10여 년에 걸쳐 완수했다. 복잡했던 사업 구조를 디지털, 환경, 산업 등 IT를 축으로 하는 3개 부문으로 단순화했다. DX 일관 서비스를 갖추기 위해 히타치는 글로벌로직스를 비롯해 IT 관련 기업을 인수하는 데 4조엔 이상을 투입했다.
IT 기업 인수는 갈수록 치열해지는 디지털 인재 확보전에서도 ‘신의 한 수’가 됐다. 해외 네트워크가 약점인 히타치와 반대로 글로벌로직스 등 새로 사들인 IT 기업들은 전 세계에 고객망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타치는 2024년까지 그룹의 디지털 인재를 9만8000명으로 지금보다 3만1000명 늘릴 계획이다. 히타치의 디지털 전략을 담당하는 다니구치 준 상무는 “DX를 통해 산업 인프라 중심이었던 사업 모델을 IT 분야로 바꿔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