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클로 사려면 최소 8400만원"…'몰빵 투자' 내몰린 日 2030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입력 2022-12-23 08:06
수정 2022-12-23 14:43
이 기사는 국내 최대 해외 투자정보 플랫폼 한경 글로벌마켓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일본 자산시장의 그늘①②에서는 일본의 부가 해외로 새나가는 '캐피털 플라이트(부의 유출)'가 거세지고 있음을 살펴봤다. 부의 유출과 함께 일본을 고민에 빠뜨리는 것이 '부의 고령화'다.

2000조엔이 넘는 일본 가계 금융자산의 60%는 60세 이상 고령자가 보유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의 금융자산은 대부분 예금과 현금형태로 은행통장과 장농 속에서 늙어가고 있다. 주식시장도 마찬가지다. 일본 개인투자가들이 보유한 주식의 67%를 60세 이상 고령자가 갖고 있다.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주식시장의 고령화에 대한 정밀 분석기사를 내놨다. 1989년 개인투자가들이 보유한 전체 주식(금액기준) 가운데 70대 이상 고령자가 보유한 주식은 15%였다. 30년 뒤인 2019년에는 이 수치가 41%로 상승했다.

같은 기간 일본 성인 인구 가운데 70대 이상의 비율은 10%에서 26%로 높아졌다. 인구의 고령화보다 주식시장의 고령화 속도가 두 배 빨랐다.


일본 주식시장의 고령화를 상징하는 종목이 한때 전세계 시가총액 1위 종목이었던 NTT이다. 버블경제 절정기였던 1987년 NTT가 도쿄증시에 상장하면서 70만명 가까운 개미투자가가 탄생했다. NTT의 주주들은 대부분 30~40대였다.

35년이 지난 올해 NTT 주주의 80% 이상은 60대 이상이다. 상장 이후 NTT의 주식은 주주가 거의 바뀌지 않은 채 고스란히 함께 늙었다는 의미다.


일본 주식을 연령별로 얼마씩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증시의 고령화가 더욱 선명해진다. 1989년 일본 개미들 가운데 주식을 가장 많이 보유한 연령층은 50대였다. 이 연령층이 1999년은 60대, 2019년에는 70대 이상으로 바뀌었다. 주식의 손바뀜없이 시장이 고스란히 늙어버렸음을 보여준다.

일본 증시의 주력인 70대의 최대 관심사는 상속이다. 일본의 고령자들은 상속할 때가 되면 주식을 팔아서 부동산을 사는 사례가 많다. 주식은 상속에 불리하기 때문이다. 상속재산을 평가할 때 주식은 시가로 평가한다. 1억엔어치를 보유하고 있으면 1억엔이 몽땅 상속세 대상이다.


반면 부동산의 가치는 한국으로 치면 공시지가라고 할 수 있는 노선가로 평가한다. 노선가는 실거래가의 80% 정도다. 1억엔짜리 부동산이라면 8000만엔만 상속세 대상이 된다. 이러다보니 주식을 파는 증권사가 고령의 자산가에게 "절세를 위해 주식을 팔고 부동산을 사시라"고 영업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는게 최근 일본 증권가의 푸념이다.

일본 개미투자가의 가장 큰 손인 고령자들이 증시를 침체에 빠뜨리는 잠재적인 요인이 된 것이다. 주식시장이 활력을 잃은 채 고스란히 늙어가고, 고령자들은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주식을 팔아 부동산을 사는 악순환을 끊으려면 젊은 세대를 끌어들여야 한다.

일본 젊은 세대들이 주식시장에 관심이 없는것도 아니다. 40~50년대 중장년층은 버블경제 붕괴의 트라우마가 있지만 20~30대 젊은 세대는 이런 경험이 없다.


노무라종합연구소 조사에서 주식투자를 하고 있다는 25~29세 젊은세대의 비율은 2018년 6.5%에서 2021년 17.9%로 급증했다. '투자를 하고 있지 않지만 흥미가 있다'는 응답자를 포함하면 49.4%에 달했다. 20대의 절반은 이미 개미투자가이거나 투자 예비군이란 뜻이다.

한일 양국 젊은이들이 주식시장에 발을 딛은 계기는 비슷하다. 한국은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내집 마련을 포기한 젊은 세대가 소액으로 투자할 수 있는 주식에 몰린다. 일본의 20~30대들은 30년째 오르지 않는 임금에 대한 불안 때문에 주식에 투자한다.


문제는 주식에 관심은 많은데 투자할 돈이 없다는 것이다. 개인투자가들이 보유한 일본 주식의 67%가 60세 이상 고령자에 집중된 반면 30대 미만 개인투자가들이 보유한 주식은 1% 남짓으로 추산된다.

더 이상 투자 리스크를 떠 안을 필요가 없는 고령자들은 투자금이 남아돌고 기꺼이 리스크를 떠 안으려는 젊은 세대는 투자할 돈이 없는 괴리는 일본증시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암초로 지적된다.

가뜩이나 자금이 부족한데 주식을 한번에 100주 단위로 사도록 한 일본증시의 최소 매입기준은 젊은 세대의 투자 진입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유니클로에 투자하려면 최소 8400만원이 필요하다.


유니클로 운영사 패스트리테일링의 주가는 8만4000엔 안팎, 100주를 사려면 840만엔이 든다. 일본에서 이케아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가구 전문회사 니토리홀딩스에 투자하려해도 최소 1640만원이 필요하다.

분산 투자는 자금력이 탄탄한 부유층의 전유물일 뿐, 투자금이 넉넉지 않은 젊은 투자가들은 ‘몰빵 투자’를 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애플 주가는 140달러 안팎이다. 미국 증시는 1주씩 주식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약 20만원이면 애플의 주주가 될 수 있다. 일본의 젊은 세대가 자국 시장을 외면하고 미국증시를 향하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단 일본 투자가들이 완전히 '미국증시 바라기'가 돼 버렸다고 속단하긴 이르다. 도요타자동차는 작년 9월말 주식 1주를 5주로 나누는 주식분할을 실시했다. 주식의 유동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도요타 주주가 되기 위한 최소 투자금액은 100만엔에서 20만엔으로 줄어들었다.

그 결과 올 3월말 도요타의 개인주주 수는 약 74만5000명으로 1년 전보다 31만1000명(72%) 늘었다. 미쓰비시자동차의 전체 주주수(약 24만명)보다 많은 개인투자가가 새로 가세했다. 개인투자가들의 자금을 끌어들이느냐는 기업하기 나름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유니클로도 지난 16일 주식 1주를 3주로 나누는 주식분할안을 발표했다.

도쿄증권거래소 관계자는 개인투자가가 늘어나는 걸 반기지 않는 상장사들이 의외로 많다고 말한다. 개인주주가 늘어나면 주주 한명한명에게 주주총회소집통지서를 우편으로 보내는 등 사무비용이 늘어난다는 이유에서다.


도쿄증권거래소는 2001년부터 "투자단위를 50만엔 미만으로 한다"는 상장규정을 적용하고 있다. 그 결과 최소 투자금액이 50만엔(주가 5000엔 미만)이 안되는 상장기업 비중이 1990년 약 1%에서 올 10월말 현재 95%까지 늘었다.

하지만 약 200개 기업은 여전히 주가가 5000엔 이상이어서 최소 투자단위가 50만엔을 넘는다. 패스트리테일링, 니토리, 세븐일레븐, 맥도날드, 워크맨 등 한번쯤 투자해보고 싶다 하는 일본 기업들 상당수가 이에 해당한다.


급기야 기요다 아키라 일본거래소그룹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29일 기자회견에서 "국민의 자산 형성을 위해 주가가 높은 기업은 투자 가능한 주식이 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청했다.

주식투자에 관심이 있는 젊은 세대들은 미국주식으로 떠나보내고 고령의 자산가들만의 리그가 돼 버린 일본증시의 현주소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