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술 몇 병.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데이비드 호크니 등 세계 미술사의 내로라하는 거장들이 작품을 그려주고 받은 대가다. 그들은 그림값으로 750mL들이 포도주 몇 병을 받고도 만족해했다. 불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림을 주고 받은 술이 세계 정상급 와인이자 ‘아트 와인’의 대명사인 ‘샤토 무통 로칠드’(무통)라서다.
무통은 1855년 프랑스에서 보르도 와인 등급제가 시행된 뒤 유일하게 1등급으로 승급한 와인이다. 승급의 가장 큰 비결은 탁월한 맛과 향이지만, 필립 드 로칠드 남작(1902~1988)이 시작한 ‘아트 마케팅’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는 게 세간의 평가다. 그는 1945년부터 매년 와인 라벨을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에게 그리게 해 무통에 ‘최고급 와인’ 이미지를 심었다. 선정된 작가들도 이를 큰 명예로 받아들였다. ‘와인광’이 대부분인 작가들은 진작 무통의 진가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필립의 손자이자 회사 공동대표인 줄리앙 드 보마르셰 드 로칠드 남작은 무통의 화가 선정을 담당하고 있다. 대학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하고 화랑 근무 이력이 있는 예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21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여태껏 모든 작가가 작품값 대신 자신의 라벨이 붙은 와인을 포함한 와인 몇 병을 선물받는 ‘명예로운 거래’에 만족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인터뷰는 지난달 무통과 국내 정상급 프리미엄 와인 수입사 나라셀라가 공동으로 개최한 갈라 디너를 계기로 진행됐다.
로칠드는 라벨을 그려주는 작가의 선정 기준으로 크게 두 가지를 꼽았다. “첫 번째는 작가의 명성입니다. 와인이 세계 최정상이니, 라벨을 그리는 작가도 세계 최정상이어야겠지요. 더 중요한 건 화가의 열정입니다. 우리는 와인에 인생을 겁니다. 조부인 필립은 샤토를 운영하기 시작한 뒤 51년간 집요하게 노력해 무통을 1등급으로 만들었죠. 이런 역사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작품에 대한 열정이 강한 작가를 선정합니다.”
로칠드는 “작가가 일단 선정되면 무통은 작품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고 했다. 포도나무나 무통의 상징인 숫양을 그리는 화가들도 있지만, 자신의 화풍을 살려내는 화가들이 더 많다. 이우환은 ‘조응’ 시리즈와 흡사한 와인 빛의 그림을 그렸다.
“이우환 작가가 그린 2013년 빈티지의 라벨은 제가 화가 선정 책임자가 된 뒤 첫 작품이기도 합니다. ‘라벨을 그리지 않겠냐’고 물어봤을 때 기뻐하던 이우환 작가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탁월한 작품성에도 놀랐지만, 함께 라벨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의 와인에 대한 사랑과 지식에 더 크게 놀랐습니다.”
무통은 지난 1일 가장 최근 빈티지인 2020년 라벨을 담당할 작가로 스코틀랜드 출신 화가인 피터 도이그를 선정했다. 또다시 무통의 라벨을 그릴 만한 한국 작가 후보가 있느냐는 질문에 로칠드는 이렇게 답했다. “요즘 저는 사진이나 만화, 프레스코화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장르적 다양성을 확장하는 데 관심이 많죠. 화가가 어디 출신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무통 라벨에서 한국 작가의 웹툰이나 미디어아트를 볼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들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