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대리석 돌 나무 등을 깎아 만들거나 쇳물을 틀에 부어서 제작하거나. 이것이 보통의 생각이다. 세부적인 제작 기법은 작가마다 다르지만 모두 겉이 딱딱하고 형태가 고정돼 있다.
오스트리아 조각가 에르빈 브룸(68)은 이런 ‘조각의 상식’을 깼다. 그의 조각은 때로는 바람에 나부끼고, 때로는 시간에 따라 모양이 바뀐다. 심지어 연약하고 말랑말랑한 사람의 신체나, 그 신체의 행위마저도 조각이 된다. 최고 권위의 국제미술제 베네치아비엔날레(2017년)에서 오스트리아 국가관 작가로 선정된, 유럽을 대표하는 현대 조각가다.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개인전 제목이 ‘나만 없어, 조각(Sculpture is Everywhere)’인 이유가 여기 있다. 그에게 조각은 대형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일상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수원시립미술관에 전시된 사진, 영상, 회화, 퍼포먼스 등 61점의 작품을 찬찬히 보다 보면 브룸이 생각하는 조각의 본질이 무엇인지 느껴진다. 살찌고, 빠지는 것도 조각
그의 독특한 작품세계는 단순한 계기에서 시작됐다. 1954년 오스트리아 브루크안데어무르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적부터 드로잉을 하곤 했다. 수사관이던 아버지는 브룸이 법조인이 되기를 원했지만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고교를 졸업할 때쯤 브룸은 잘츠부르크의 한 미대 회화과에 지원서를 냈다. 하지만 회화과는 브룸을 받아주지 않고 대신 조소과에 그를 넣었다. 조각의 ‘조’자도 모르던 그에겐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마음속에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조각이 도대체 뭐길래.”
그래서 브룸은 조각과 다른 예술 간 경계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재료부터가 그랬다. 1980년대 말에는 옷과 천을, 1990년대 들어서는 사람의 몸을, 1990년대 중반 이후엔 사람의 움직임을 조각 재료로 쓰기 시작했다. “형태가 변화하거나, 부피가 증가하는 모든 것이 조각이다.” 이것이 그가 40년간의 작품 활동을 통해 얻은 결론이다.
1부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영상 작품 ‘8일 만에 L 사이즈에서 XXL 사이즈 되는 법’(1993)이 대표적이다. 영상에 나오는 남자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고열량 음식을 섭취한다. 그 옆에 전시된 책에는 그가 먹었던 음식 목록이 빽빽이 적혀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자의 몸은 점점 커지고 비대해진다. 그에게 이 모든 과정은 조각이다. “음식 섭취를 통해 살이 찌고 빠지는 과정은 우리가 살면서 가장 먼저 겪을 수 있는 ‘조각적 경험’입니다.”
시간도 그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2부 전시장엔 토끼 인형, 의자 등 일상의 사물이 놓여 있다. 그 밑에는 ‘이 인형이나 의자를 들고 어떤 자세를 취하라’는 그림 지시문도 함께 적혀 있다. 관람객은 좌대에 올라 자세를 취한다. 그 순간 관람객은 조각이 된다. 브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1분 조각’ 시리즈다. 모든 것이 빨리 쓰이고 버려지는 현대사회에서 조각 역시 짧은 시간 동안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퍼포먼스 작품이다. “예술은 의식을 깨우는 도구”상식을 깬 그의 작품은 유쾌하고 재밌다. 하지만 가볍지만은 않다. 그는 다양한 현대사회의 문제를 작품을 통해 얘기한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 중 하나인 높이 11m, 무게 610㎏의 ‘사순절 천’(2020)도 그렇다. 거대한 보라색 니트 모양의 이 작품은 그가 2년 전 사순절(기독교에서 부활절을 준비하며 40일간 회개하는 기간)을 맞아 오스트리아 슈테판대성당의 중앙 제단에 걸었던 것이다. 브룸은 여기에 과도한 성장사회에 대한 풍자를 담았다.
“사회는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그 이면엔 문제도 있죠. ‘비만’처럼요. 나중에 인류가 점점 진화하면 이렇게 큰 니트를 입을 만큼 뚱뚱해지지 않을까요?”
지방으로 가득 찬 것 같은 ‘팻 컨버터블(팻 카)’(2019) 역시 과도한 소비지상주의를 비판한다. 분홍색 빈티지 자동차는 보닛부터 사이드미러까지 모든 곳이 마치 포동포동 살이 찐 아이처럼 부풀어 있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더 크고, 좋은 것을 갈망하는 현대인의 욕망을 표현했다. 그 옆의 납작한 자동차 모양 작품 ‘UFO’(2006)는 기후 변화를 꼬집는 작품이다. 브룸이 직접 포르쉐 924 중고차를 구매해 녹아내린 것처럼 재창작했다. ‘기후 변화로 인해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세상에선 자동차도 이렇게 변하지 않을까’ 하는 작가의 상상력을 담았다.
그렇다면 예술을 통해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그의 대답은 ‘노(no)’다. “예술로 사회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는 것뿐이죠. 우리 세대는 지금까지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못하고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왔습니다. 앞으론 젊은 세대가 행동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 믿어요.” 전시는 내년 3월 19일까지.
수원=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