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만기 2년8개월이 흘렀지만 투자자들은 수익은커녕 원금조차 회수하지 못하고 있다. KB증권이 2019년 판매한 1000억원 규모의 무역금융펀드 파생결합증권(DLS)의 얘기다. 이런 가운데 애간장 졸이던 투자자들에게 최근 희소식이 전해졌다. 개인투자자가 KB증권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회사가 투자금 전액을 돌려줘야 한다'는 판결이 처음 시장에 전해진 것이다. 사실상 판매사의 잘못을 인정한 것이어서 파장이 예상된다.
1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남부지법 민사12부는 개인투자자 서모씨가 KB증권과 KB증권 직원 정모씨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1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증권사가 투자권유 시 설명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이번 판결은 판매사인 KB증권에게 피해 투자자가 입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시한 첫 사례로 알려졌다.
이번 1심 판결에서 재판부는 KB증권과 직원 정씨가 원고인 개인투자자 서씨에게 당초 신탁금액인 5억원과 함께 이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판사 이영풍·정종건·이학인)는 "피고들은 투자권유 과정에서 '적합성 원칙'(투자자 정보를 미리 파악해 적합한 투자방식을 선택, 투자하도록 권유)과 '설명의무'(투자상품 가입 권유 시 위험성을 상세히 설명), '부당권유 금지의무'(투자권유 시 불확실한 사항을 단정적으로 판단해 제공하거나, 확실하다고 오인하게 할 소지가 있는 내용을 알리는 것을 금지) 등을 위반했으므로 공동으로 합계 5억원 상당의 손해배상금 또는 부당이득금을 반환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KB증권은 이 같은 1심 판결에 불복, 항소한 상태다. 항소심은 내년 1월 18일 열릴 예정이다.
앞서 KB증권은 투자자 200여명에게 'KB able DLS 신탁'(TA 인슈런스 무역금융) 상품 1055억6500만원어치를 팔았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 여파로 전 세계 무역 규모가 감소하자 2020년 4월 만기 상환에 실패했고 현재까지도 청산 작업은 거듭 지연되고 있다. 만기일은 내년 5월로 잠정 연장된 상태다.
이 상품은 NH투자증권이 아시아 무역금융 펀드(ATFF)와 연계해 발행한 DLS 상품이다. NH투자증권이 DLS의 기초자산으로 삼은 이 무역금융 펀드는 홍콩 자산운용사인 트랜스아시아(TA)가 만든 것으로 수출입기업의 매출채권에 투자한다. 쉽게 말해서 DLS의 발행은 NH투자증권에서, 판매는 KB증권에서 이뤄진 것이다. 무역 환경이 큰 타격 없이 성장을 이어갔을 경우 기대수익률은 연 4.3% 수준이었다.
하지만 KB증권과 NH투자증권은 '네 탓' 공방만 거듭할 뿐 현재까지도 이렇다할 결론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KB증권은 작년 3월 NH투자증권을 상대로 부당이득반환청구 소송을 내고 판매액 전액인 1056억원가량을 청구했다. 이들 소송전의 1심 판결은 내년 말께가 돼서야 나올 것으로 보인다.
KB증권은 소를 제기할 당시 "우리가 해당 증권을 인수한 가장 큰 이유는 증권의 기초자산 발행사가 대출참여계약에 따라 참여하는 무역금융 대출자산의 대출채권이 미상환되는 위험이 발생하더라도, 높은 신용등급의 보험사에서 지급하는 보험금과 바이백 약정에 의한 매수대금으로 해당 증권의 만기상환금 지급이 보장된다는 NH투자증권의 설명을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소송 건에서 원고인 KB증권은 법무법인 광장이, 피고인 NH투자증권은 법무법인 태평양이 각각 대리를 맡았다.
투자자들이 결국 개별 소송에 나서게 된 배경도 결국 두 회사가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한 모습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투자자 전액 배상을 결정한 1심 판결이 나온 만큼, 전액 배상을 요구하는 이 상품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법조계와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피해 투자자들 대부분이 KB증권과 협의해 원금 절반을 선지급 받기로 한 상태다. 앞서 작년 초 KB증권은 일체 민·형사상 소송이나 민원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달고, 여기에 동의하는 투자자들에게 한해 가지급금 50%를 지급하기로 한 바 있다.
이 사건을 대리한 이주희 법무법인 다산 변호사는 "분쟁 조정이나 합의가 아닌 '소송'이라는 정면승부를 통해 판결로써 판매사의 전액 배상을 끌어냈단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투자자들을 직접 대면하는 것은 발행사가 아닌 판매사란 점에서, 발행사 못지않게 판매사의 책임 또한 크다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한편 다른 법무법인에서도 개인투자자와 법인투자자를 대리해 KB증권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곳이 포착된다. 법무법인 대호는 지난달 14일 부당이득반환 소송을 제기하고 회사에 50억원가량을 청구했다.
사건을 대리한 이성우 대호 변호사는 "각 투자자들로부터 책임을 추궁당하고 있는 KB증권으로선 면책을 위해서라도 NH투자증권에 소송을 제기했을 것"이라며 "통상 이런 거액의 투자상품 분쟁은 금융감독원 등이 나서서 분쟁 조정을 한다. 두 회사 간의 소송을 비롯해 각 개인투자자들과 KB증권 간의 소송 결과를 당국도 주시할 것으로 보이며, 이들 소송이 마무리돼야 분쟁조정도 본격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신민경 한경닷컴 기자 radi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