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 무시하는 태광그룹…'제2의 남양유업' 전철 밟나 [강경민의 기업 인사이드]

입력 2022-12-18 13:06
수정 2022-12-18 15:57

“그룹 투자계획에 대한 사실관계 확인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다음주 월요일까지 입장을 정리하겠습니다” (태광산업 홍보실)

금요일인 지난 16일 오전 한 언론 매체는 태광그룹이 향후 10년 동안 12조원을 투입하는 대형 투자에 나선다고 보도했다. 기자들의 문의가 이어지자 그룹 핵심 계열사인 태광산업은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있다는 짤막한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이어 오후 5시께 오늘 중으로 사실관계 확인이 어려우니 내주 월요일에 입장을 정리하겠다고 다시 통보했다.

태광그룹의 본체이자 핵심 계열사인 태광산업은 석유화학과 섬유 부문을 주력으로 하는 종합섬유업체다. 대한화섬도 태광그룹의 섬유부문 계열사다. 태광그룹은 흥국생명과 흥국화재 등 금융계열사도 거느리고 있다.

태광그룹의 주축 계열사인 태광산업은 국내 최초로 아크릴섬유(1967년)와 스판덱스(1979년)를 생산한 화학·섬유업체다. 이런 명성에 걸맞지 않게 보수적인 경영 기조를 이어가는 기업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이호진 전 회장이 횡령·배임 등 ‘오너 리스크’에 휘말리면서 2012년 이후 신규 투자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태광산업이 멈췄던 투자를 재개한다는 보도에 시장은 술렁였다.

하지만 태광그룹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잇단 질문에도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통상 투자계획 기사가 보도될 경우 대부분의 기업들이 즉시 부연설명을 하는 등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는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한 기관투자자는 “PR과 IR에서 내부 투자계획에 대한 확인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사실여부에 대한 입장조차 제때 내지 않는 것은 정상적인 기업의 모습으로 보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태광그룹의 이런 행태는 주식시장에서 악명이 높은 이미지와도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태광산업 주식의 특징은 ‘비싼 가격’과 ‘둔한 움직임’이다. 태광산업 시가총액은 8305억원으로, 현금성 자산(1조3718억원)보다도 적다. 하루 거래량도 1000주를 넘지 못한다. 주가순자산비율(PBR)은 0.19배에 불과하다. 코스피 기업 중 최하위 수준일 정도로 극심한 저평가에 시달리고 있다.

주주들은 유동성 확대를 위해 액면분할을 잇달아 요구하고 있지만 회사 측은 묵묵부답이다. 배당에도 소극적이다. 주주들과의 소통도 거의 없다. 지난 10년간 일반주주 대상 기업설명회를 한 차례도 열지 않았다.

최근엔 그룹 계열사인 흥국생명 유상증자에 태광산업이 참여를 검토한다고 밝혔다가 트러스톤자산운용을 비롯한 주주들의 반발에 닷새만에 계획을 철회하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흥국생명 주식을 한 주도 보유하지 않은 태광산업이 오너 일가 대신에 흥국생명을 지원하는 방식이어서, 개인 투자자(개미)와 기관투자가의 주주가치를 훼손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시장에선 태광산업이 소비자들과 주주들을 무시했다가 존폐 위기까지 몰린 남양유업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물론 B2C 기업인 남양유업과 B2B 업종을 주력으로 하는 태광산업을 똑같은 잣대로 비교하긴 어렵다. 다만 시장의 신뢰를 얻기는 어렵지만 잃는 건 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태광그룹도 깨닫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