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는 끝나지 않았다. 모습을 달리할 뿐이다.”
지난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뒤 냉전 종식으로 30여 년간 이어진 세계화가 마침표를 찍을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코로나19에 뒤이은 전쟁으로 글로벌 공급망 붕괴가 가속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로벌 교역 형태가 바뀌는 것일 뿐 ‘세계화의 종말’이나 ‘탈세계화(deglobalization)’는 아니라는 분석이 나왔다.
블룸버그통신은 다국적 기업들이 새로운 지정학적 도전에 적응하기 위해 글로벌 무역 시스템을 조정하는 이른바 ‘재세계화(reglobalization)’가 일어나고 있다고 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미국 컨설팅 업체 맥킨지도 지난달 보고서에서 “경제적, 정치적 혼란이 세계화를 해체시키고 있다는 추측을 불러일으켰지만 어떤 나라도 자급자족할 수는 없다”며 세계화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날 블룸버그는 미국, 중국 등 주요 국가에서 나타나는 재세계화의 특징을 일곱 가지로 정리해 소개했다. 코로나19 이후 미국은 유럽산 제품 수입을 늘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의 공장’인 중국이 ‘제로 코로나’ 정책을 고수해 생산 활동에 차질이 빚어지자 대중 의존도를 줄이고 있는 것이다. 미 통계국에 따르면 지난 9월 미국이 유럽연합(EU)과 영국에서 수입한 상품(507억달러)은 중국산 수입품(492억달러)보다 많았다. 블룸버그는 “조 바이든 행정부가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우방국으로 생산기지 이전)’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전통적 동맹 관계인 유럽과의 교역이 꾸준히 증가했다”고 전했다.
글로벌 반도체업계의 탈(脫)중국 행렬도 두드러진 흐름이 되고 있다. 중국 견제에 사활을 건 미국이 자국에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는 기업에 세액공제 혜택 등을 주는 ‘반도체 및 과학법’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 투자은행(IB) 코웬은 향후 5년간 반도체 회사들이 중국 밖에서 새로운 반도체 공장을 짓는 데 총 1100억달러 이상을 투자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국은 미국이 세운 ‘관세장벽’에 가로막혀 수출시장을 다변화하고 있다. 특히 중국 주도로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10개국 등 15개국이 참여하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국가에 대한 수출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대만과 밀착하는 국가에 중국이 경제적 보복을 가하는 것도 눈에 띄는 현상이다. 지난해 리투아니아가 수도 빌뉴스에 대만 대표처를 열자 중국은 리투아니아산 제품 수입을 의도적으로 줄이며 압박에 나섰다. EU 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리투아니아의 대중 수출액은 지난해 8월 2760만달러에서 올해 9월 1070만달러로 약 60% 감소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글로벌 무역 지도를 뒤바꾼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미 통계국에 따르면 대(對)러시아 제재를 이끈 미국은 러시아와의 교역량이 오랜 적대국인 이라크의 절반 수준(지난 9월 기준)으로 줄어들었다. 독일도 지난 3월 후 러시아산 수입이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 밖에 영국 무역정책관측소는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여파로 지난해 7월 EU에 대한 영국의 상품 수출이 같은 해 1월 대비 14% 감소했다고 밝혔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