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재 이사장 "글은 예술의 뿌리…앞으로 30년도 문학 지원에 전념"

입력 2022-12-05 18:06
수정 2023-04-30 17:16

한국 작가 최초로 세계적 권위의 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 영국추리작가협회가 주관하는 대거상을 한국 작가 가운데 처음으로 받은 소설가 윤고은….

한국 문학이 맞이한 영광의 순간마다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바로 대산문화재단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어 번역본은 대산문화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출판지원 사업을 통해 세상에 나왔고, 윤고은의 <밤의 여행자들>은 대산창작기금 사업을 통해 출간됐다. 1992년 교보생명의 출연으로 설립된 대산문화재단은 30년간 일편단심 한국 문학만을 뒷바라지해 왔다. 국내 대기업 출연 문화재단으로는 유일무이하게 시 소설 희곡평론 번역 등 문학을 전문적으로 지원한다.

오는 29일 대산문화재단 30주년을 앞두고 한국경제신문과 한 서면 인터뷰에서 신창재 대산문화재단 이사장(교보생명 회장·사진)은 “문학은 모든 예술문화의 핵심이자 근간”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디지털 시대를 맞아 독서 인구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고 하지만 흥미 위주 콘텐츠가 넘쳐나는 요즘에 문학의 가치는 오히려 더 중요해졌다”고 설명했다.

신 이사장은 최근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가 대산문화재단 30주년을 축하하며 “문학은 인간과 사회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한 것을 언급했다.

“사회의 명암을 묘사하는 문학 작품들을 많이 읽을수록 우리는 더욱 정확하고 깊이 있게 우리와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건 내 모습을 비춘 거울을 공들여 바라보는 것과 같죠. 흥미 위주 콘텐츠가 넘쳐날수록 문학의 가치가 빛나는 까닭입니다.”

대산문화재단이 30년간 문학 생태계에 투입한 금액은 인건비와 관리비를 제하고 582억원 수준이다. 대산문화재단의 지원 사업은 작가 유망주 발굴부터 해외 소개까지 전 단계에 걸쳐 있다. 대산청소년문학상과 대산대학문학상을 통해 작가를 꿈꾸는 청소년 및 청년을 발굴하고 육성해 왔다. 20년 전 제1회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은 김애란 작가는 노벨문학상 작가가 극찬하는 국내 대표 소설가로 자리매김했다. 한국 문단에서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인 소설가 김병운·박서련·조우리, 시인 유진목·이병일 등이 대산청소년문학상 출신이다.

대산창작기금은 신진 작가가 창작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지원군 역할을 한다. 저작권 등 모든 권리를 작가에 보장하면서 1인당 1000만원의 창작지원금을 준다. 한국문학 번역출판지원 사업은 국내 유수 작품을 여러 언어로 번역해 해외에서 출간해주도록 돕는다. 대산문학상은 총상금 2억원의 국내 최대 종합문학상으로, 시상 분야가 시·소설·평론·희곡·번역을 아우른다.

책은 교보생명그룹의 뿌리이기도 하다. 신 이사장의 아버지인 고(故) 대산 신용호 선생은 어린 시절 오랫동안 투병 생활을 하느라 정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런 그가 교보생명을 세우고 이끈 원동력은 꾸준한 독서 습관으로 꼽힌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교보문고의 철학은 그렇게 나왔다.

신 이사장이 특히 자부심을 가진 사업은 서울국제문학포럼이다. 세계적 작가들을 서울로 초대해 국내 문인들과 교류하는 자리다. 2000년에 시작해 2005년, 2011년, 2017년 네 차례 개최했다. 그는 “이 포럼을 계기로 한국을 찾은 튀르키예 소설가 오르한 파묵,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 중국 소설가 모옌이 몇 년 뒤 줄줄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며 “재단이 좋은 작가들을 제대로 선정해 한국 독자에게 소개한 것 같아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신 이사장은 국내외 문학 교류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2017년 프랑스 레종도뇌르 훈장, 2018년 은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대산문화재단은 새로운 30년 목표를 ‘문학과의 호흡, 사람의 성장’으로 잡았다. 신 이사장은 “재단은 앞으로 모든 사람이 다양한 문학적 경험을 통해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며 성숙한 ‘세계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했다.

한국 문학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신문사 신춘문예나 주요 문예지 공모전을 통해 문학 활동을 시작하는 ‘등단’의 장벽은 점점 낮아지고, 웹소설 등 새로운 형식의 문학 작품이 늘어나는 중이다. 신 이사장은 “재단에서 운영하고 있는 공모사업은 등단하지 않은 작가에게도 그 문이 열려 있다”고 했다. 다만 웹소설과 같은 새로운 창작 콘텐츠 지원에 대해서는 앞으로 고민해나갈 영역으로 남겨뒀다.

재단은 얄팍한 변화보다 ‘그간 해오던 일을 더욱 잘하자’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신 이사장은 말했다. “대산문화재단은 이제 이십대 청년의 시기를 통과해 ‘이립(而立)’에 이르렀습니다. 이립은 확고한 목표 위에 서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는 의미가 있죠. 재단은 출범 때부터 문학을 집중적으로 지원해왔고 많은 유무형의 성과와 자산을 쌓아왔습니다. 앞으로의 30년도 문학을 중심으로 한 공익사업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