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는 죽었다.”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미술대학 학생들은 모였다 하면 이런 얘기를 했다. 미디어아트와 설치미술이 베네치아비엔날레 등 주요 미술 행사의 상을 싹쓸이할 때였다. 서울대 미대생이던 20대의 이만나 작가(51·경성대 서양화과 교수)는 당시 선배들에게 “아직도 붓을 잡고 있냐”는 놀림을 받곤 했다. 그는 미술학원 강사로 돈을 모아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조형예술대로 ‘그림 유학’까지 다녀온 괴짜였다.
유행은 돌고 돈다. 지금 미술계의 대세는 ‘초현실주의적 분위기의 구상화’다. 5일 끝난 크리스티 홍콩 메이저 경매에서도 니콜라스 파티와 스콧 칸, 마르크 샤갈 등의 초현실적 구상화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이 작가의 인기도 상승세다.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더 이상 거기에 없는 풍경’에서는 개막 1주일 만에 출품작(25점)의 절반 이상이 예약되거나 팔렸다. 그림 대부분이 집안에 걸어두기 어려운 대작(50~100호)이고, 국내 미술시장 상황이 좋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다.
그의 그림은 친숙한 소재를 다룬다. 금호터널 입구 뒤 산동네에 아파트가 올라가는 모습, 흙먼지가 쌓인 학교 테니스 코트 등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을 담았다. 하지만 평범한 사실주의 그림을 뛰어넘는 ‘초현실적 감각’이 느껴진다. 너무나도 사실주의적인 접근이 오히려 풍경에 대한 고정관념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흐린 날 구름의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빛, 뿌연 미세먼지나 안개, 어두운 밤 희미하게 비치는 조명 등을 세밀하게 화폭에 담았다. 실제로 봤지만 머릿속에서 기억하지 못했던 장면들이다.
이 작가는 “오랜 시간을 들여 섬세하게 디테일을 표현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색을 아주 얇게 덧칠하는 ‘글레이징’ 기법을 써요. 유화물감으로 일종의 반투명한 막을 만들죠. 그러다 보니 보는 각도에 따라 빛 반사가 달라져 심도(깊이감)가 제각각인데 카메라의 오토 포커싱(자동으로 초점을 맞추는 기능)이 고장 난 것 같다고 그러더군요.”
물감을 덧칠하고 말리기를 반복하니 주 5일을 하루 평균 12시간 넘게 작업하는데도 그림 하나를 완성하는 데 최소 두 달이 걸린다. 이번 개인전이 3년 만인 것도 이 때문이다.
“작품을 너무 천천히 그린다. 작은 작품을 많이 그려달라는 원성을 듣는데 저는 제가 만족할 수 있는 작업을 할 겁니다. ‘그림은 안 된다’고 할 때 그림만 그렸던 고집이 어디 가겠습니까. 하하.” 전시는 오는 25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