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의 ‘벼랑 끝 대치’로 국회가 올해도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을 넘기고 말았다. ‘선(先) 예산안 처리, 후(後) 국정조사 시행’에 합의했던 더불어민주당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해임건의안 카드를 새로 꺼내들면서 예산안 협상이 후순위로 밀려난 결과다. 169석의 거대 야당이 ‘윤석열표 예산’은 대폭 칼질하고, ‘이재명표 예산’은 대거 되살리면서 여야의 협상은 사실상 올스톱됐다. “국회에 예산 심의·의결권이 있다고는 하지만 정권을 빼앗긴 야당이 마치 정권을 잡은 듯 독주한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새 처리시한 9일로 잡았지만…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인 2일 김진표 국회의장은 ‘교통정리’에 나섰다. 이날 본회의를 열지 않는 대신 정기국회가 마무리되는 8, 9일 본회의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예산안 처리를 위한 새 ‘데드라인’을 9일로 못박은 셈이다.
이날 본회의에서 이 장관 해임건의안을 보고하려던 민주당은 즉각 반발했다.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는 의원총회에서 “이미 물러났어야 할 장관 한 명을 지키고자 국회가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마저 어기고 기약 없이 멈춰 서면 국민 상식에 부합하겠느냐”며 “예산안도 민생법안도 여당의 ‘이상민 방탄’에 멈춰 섰다”고 비판했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예산안 발목 잡기는 결국 ‘대선 불복’이라고 반격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경제와 민생 회복을 하루라도 앞당기고자 최선을 다했지만 민주당이 다수 의석을 이용해 정부 예산안을 마구 칼질하는 탓에 도저히 시한을 맞출 수 없었다”며 “국민 뜻에 따라 윤석열 정부가 새로이 출범했음에도 아직도 문재인 정권이 집권하는 듯 행동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尹 예산 삭감, 李 예산은 부활앞서 민주당은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 대선공약이던 공공분양주택 예산 1조1393억원은 삭감하고, 공공임대주택 예산은 5조9409억원 증액하는 안을 단독으로 처리했다. 이재명 대표가 ‘공공임대주택 예산 삭감 저지를 위한 간담회’까지 열었을 정도로 공들이고 있는 예산이다. 이철규 국민의힘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간사는 “임대주택 예산은 이미 윤석열 정부가 문재인 정부 5년 평균치(16조8000억원)보다 많은 16조9000억원을 편성했는데, 여기에 6조원 예산을 추가로 요구하는 것”이라며 “예산 심사 내내 이 대표 정책 사업의 예산을 늘리는 데만 혈안이 돼 있다”고 비판했다.
이 대표의 ‘간판 공약’이던 지역화폐 관련 예산도 비용 투입 대비 소상공인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크지 않다는 이유로 정부 예산안에서는 빠졌지만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5000억원이 되살아났다. ○의석수로 정부·여당 압박하는 野예산안 협상이 평행선을 달리자 민주당은 ‘민주당표 수정안’ 상정을 언급하면서 여당을 압박하고 있다. 여당과 예산안 합의가 되지 않을 경우 정부 예산안을 칼질한 ‘감액 수정안’을 제출하겠다는 것이다. 정부 동의가 필요한 증액을 포기하고서라도 정부안 통과는 막겠다는 의도다. 다만 실제 본회의에서 표대결이 이뤄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전망이다. 민주당이 필요로 하는 증액을 할 수 없는 데다 정부의 ‘예산 편성권’을 침해한다는 점에서 적법성 논란이 벌어질 수 있어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여야는 이날 오후 김 의장이 주재한 회의에서 정책위원회 의장과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간사가 5일까지 예산안 감액·증액 및 예산부수법안에 대해 협상하고 남은 쟁점은 여야 원내대표가 협상을 벌여 정기국회 내에 예산 심사를 마무리하기로 합의했다.
고재연/이유정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