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아홉이 돼서야 아스퍼거를 진단받다

입력 2022-11-30 18:16
수정 2022-12-01 00:41
그의 삶은 메모 없이는 유지될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타인과의 약속도 그랬다. 안개 속에 갇힌 듯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져 결국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그에게 익숙한 이런 경험이 자폐의 한 증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서른아홉 살 때의 일이었다.

최근 출간된 <걸을 때마다 조금씩 내가 된다>(웅진지식하우스)는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영국 작가 캐서린 메이의 신간 에세이다. ‘걷기’라는 행위를 통해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기록했다.

저자는 책에서 “엄마, 아내, 작가로 그럴듯한 삶을 살았지만 그 삶이 진짜 삶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일과 육아, 인간관계에 짓눌렸다. 삶은 제자리를 맴돌고 마음은 늘 부평초처럼 떠돌았다.

어느 날 숲에서 길을 잃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런데 두려움보다 해방감이 더 컸다. 사방에서 자연의 소리가 들려왔다. 방황하는 그에게 길을 안내해주는 듯했다.

자연의 소리를 더 듣고자 저자는 영국의 가파르고 험준한 트래킹 코스인 ‘사우스웨스트 코스트 패스’를 걸었다. 그러다 라디오에서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의 인터뷰를 듣고, 자신도 같은 질환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대인관계에 문제가 생기고 행동이나 관심, 활동 분야가 한정되는 발달장애다.

그제야 삶의 비밀이 풀렸다. 어릴 적부터 외톨이였던 성향, 힘든 상황이 닥칠 때마다 나만의 공간으로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행동, 아이를 사랑하면서도 다른 엄마들과 달리 도망가고 싶은 마음 등이 그저 민감해서가 아니라 병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저자는 이제 적극적으로 치료에 나선다. 완치가 어렵다는 걸 알지만 본래의 나로 돌아가기 위해 삶의 각도를 다시 조정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폐를 가진 우리는 책 속에서 흔히 묘사하듯 멍하고 무감각한 로봇 같은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재미있고 다정하며 공감 능력도 높다. 단지 뇌가 조금 다르게 작동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종종 지독히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뿐이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