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해지고 싶지 않다"…일본서 벌어진 무서운 상황 [정영효의 인사이드 재팬]

입력 2022-11-30 06:55
수정 2022-11-30 09:16

"일본 기업들은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는 리스크가 있습니다."

2013년 9월 세계 4대 사모펀드(PEF) 운용사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의 설립자인 헨리 크래비스는 미국 뉴욕을 방문한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베 총리가 뉴육증권거래소에서 의기양양하게 "바이 마이 아베노믹스(Buy my Abenomics)"라며 일본 투자를 권하던 때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일본의 경영인들이 실패를 두려워한 나머지 구조개혁을 미루고 있다는게 크래비스가 말한 '움직이지 않는 리스크'였다.

같은 달 일본을 방문해서도 크래비스의 쓴 소리는 이어졌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해보길 바란다. 먼저 '꿈이 있습니까?', 다음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합니까'라고 물어보라."고 했다.


크래비스는 이미 10년 전 활력을 잃어가는 일본과 일본인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2022년 5월 일본 경제산업성이 발표한 미래인재비전 백서에 따르면 '장래의 꿈을 갖고 있다'는 일본의 18세 고교생 비율은 60%로 주요국 가운데 가장 낮았다. 중국과 미국 고교생의 96%와 94%가 꿈을 갖고 있다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한국의 18세 청소년도 82%가 꿈을 갖고 있었다.


'자신이 국가와 사회를 바꿀수 있다'고 답한 일본의 18세 청소년은 18%에 불과했다. 미국과 중국은 66%, 한국이 40%였다.


중고교 시절 미래의 진로를 결정한 일본 학생은 3.8%에 불과했다. 66%가 대학 졸업반 즈음에서야 장래 희망을 정했다. 미국과 한국 학생의 25.2%와 17.8%가 중고교 시절부터 진로를 정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2022년 5월 아사히신문이 독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도 비슷하다. '(청소년기 장래에) 유명해지고 싶었습니까'라고 질문에 응답자의 73%가 '유명해지고 싶지 않았다'고 답했다. '눈에 띄고 싶지 않다(820명)', '자신에겐 그럴 힘이 없다고 생각했다(564명)', '유명해지면 행동에 제약이 심해질 것 같다(541명)', '주목받는 것이 싫다(535명)' 등의 이유였다.


'유명해지는 건 이익일까요'라는 물음에 70%가 '이익이라고도, 손해라고도 보기 어렵다', 16%가 '손해다'라고 답한데서도 적극성을 잃어가는 일본인의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자신의 의견을 펼치는데도 지극히 소극적이다. 일본 최대 광고기획사 덴쓰 계열의 덴쓰종합연구소와 이케다 겐이치 도시샤대 교수가 공동으로 실시한 '세계 가치관 조사'에서 '불매운동에 참가한 적이 있다'는 일본인은 1.9%였다. 77개 조사대상국 가운데 70위였다.

1위인 아이슬랜드인은 35.2%, 2위 스웨덴인은 23.5%가 불매운동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미국인도 5명 가운데 1명 이상(21.5%)이 불매운동에 참여했다.


'평화적인 데모에 참가한 적이 있다'는 응답도 5.8%로 69위에 그쳤다. 15~29세 일본 젊은 세대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63.2%가 '사회운동에 참여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얼굴이나 이름이 드러나는데 저항감이 있다'(22.2%)가 사회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였다. '참가할 지식이 부족하다'(21.6%)는 자신감 부족형이 뒤를 이었다.


20~30대 젊은 층의 경우 '데모는 사회 전체에 폐를 끼치는 것'이라거나 '데모는 자기만족이나 개인적인 원한으로 참가하는 것'이라는 응답이 50~60%에 달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