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경기 용인 레이크사이드CC를 취재하러 가는 차 안에서 오랫동안 알고 지낸 중소기업 오너 A씨를 떠올렸다. 어디를 가나 스스로를 ‘시계 좋아하는 골프 마니아’라고 소개하는 그와 마지막으로 라운드한 곳이 레이크사이드CC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A씨는 몇 가지 이유를 들며 레이크사이드CC를 ‘롤렉스’에 비유했다.
“롤렉스는 파텍필립 같은 초고가 시계는 아니지만, 선호도와 인지도는 오히려 더 높습니다. 품격이나 위상도 결코 떨어지지 않죠. 상처라도 날까 무서워 집안에 모셔놓지 않아도 되는, 그러니까 매일 손목에 둘러도 되는 우리 곁에 있는 명품입니다. 레이크사이드CC가 바로 그런 골프장이에요.”
오랜만에 찾은 레이크사이드CC 잔디를 밟으면서 A씨의 비유가 ‘찰떡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우스케이프CC처럼 입이 떡 벌어지는 절경이나 경기 여주 트리니티CC와 같은 ‘초특급 서비스’는 없지만 난이도, 잔디 상태, 서비스, 접근성 등 뭐 하나 빠지지 않는 골프장이어서다. 굳이 따지면 일반 골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손에 넣을 수 있는 명품’이랄까.
올해 은퇴한 프로골퍼 홍란과 최나연이 첫 승을 올린 프로 무대(2001~2015년 ‘레이크사이드 KLPGA여자오픈)였던 이곳은 이제 온전히 아마추어 골퍼들의 세상이 됐다. 특히 54홀 중 36홀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퍼블릭 코스다. 호수를 낀 명품 골프장회원제인 서코스에서 라운딩을 시작했다. 첫 번째 홀부터 파5다. 화이트티 기준 482m짜리 왼쪽 도그레그였다. 내리막 경사라 부담은 덜했다. 드라이버, 우드, 아이언, 어프로치 모두 괜찮았다. 첫 홀을 보기로 홀아웃한 뒤 2번홀(파4)은 파로 마쳤다.
그러자 비로소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잔잔한 호수를 옆구리에 끼고 있는 서코스에서 들리는 건 새 소리뿐이었다. 서울 강남에서 30~40분 만에 닿을 수 있는 곳에 이렇게 울창한 자연이 있다는 건 축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였다. 3번홀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규정대로 치면 평소보다 5~10타 더 나온다”는 캐디의 얘기는 괜한 말이 아니었다. 일단 길다. 레이크사이드CC의 서코스 총전장은 7079m다. 동코스와 남코스도 7000m가 넘는다. 일반 골프장보다 300~500m 길다. 코스를 벗어나면 십중팔구 OB 처리하는 레이크사이드CC의 로컬 룰도 스코어를 엉망으로 만드는 데 한몫한다. 김상우 레이크사이드CC 지원팀장은 “공이 코스를 벗어나면 거의 90% 이상이 OB로 처리한다”며 “방향성이 나쁜 골퍼들은 피하고 싶은 골프장”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깊은 러프, 곳곳에 파놓은 벙커, 워터해저드 등 각종 함정이 더해진다. 빽빽하게 잔디로 채워진 페어웨이에 똑바로 공을 올려놓지 못하거나 그린을 놓치면 그에 대한 묵직한 벌칙이 내려진다. 풍경도 난이도도 ‘1등’ 11번홀부담감을 가득 안고 시그니처홀인 서코스 11번홀(파5)에 들어섰다. 핸디캡 1번홀이다. 티잉 에이리어부터 홀까지 내리막으로 곧게 뻗은 긴 파5홀. 블랙 티 575m, 블루 티 546m, 화이트 티 515m, 시니어 티 489m, 레이디 티 428m로, ‘투온’이 쉽지 않은 거리다. 하지만 시야가 탁 트인 덕분에 저 멀리 그린까지 한눈에 보였다.
오른쪽에 길게 늘어선 벙커와 워터해저드만 피하면 된다. 그게 신경 쓰였다. 티샷 준비를 하는데 페어웨이 안쪽으로 들어온 워터해저드에 자꾸 눈이 갔다. “230m까지 보내도 물에 안 들어간다”는 캐디의 설명에도, 굳이 페어웨이 왼쪽을 겨냥했다.
‘오른쪽으로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있었던 걸까. 조금만 왼쪽으로 치려던 게 확 당겨져 왼쪽 러프에 공이 떨어졌다. 짧은 아이언으로 레이업했어야 했는데, 욕심을 부렸다. 최대한 멀리 보내려고 5번 아이언을 들었는데, 채가 긴 풀에 감긴 탓에 겨우 50m 전진에 그쳤다. 다시 러프. 한 번 흔들린 멘털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물을 건너 그린 근처까지 보내려고 친 세 번째 샷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워터해저드로 향했다.
다섯 번째 샷 만에 그린에 올렸지만, 10m 퍼팅에 다시 한번 발목이 잡혔다. 멀리서 봤을 때 평평했던 그린은 올라서서 보니 상당히 기울어져 있었다. 그린도 빨랐다. 레이크사이드CC 그린 스피드는 2.8~3.2m(스팀프미터 기준)다. 살살 친다고 쳤는데, 내리막을 탄 공은 홀을 지나 반대편 끝까지 달렸다. 3퍼트, 트리플 보기. 코스 설계자가 파놓은 함정에 모두 빠져들다 보니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레이크사이드CC는 모든 홀이 투 그린인데, 하나같이 그린 좌우와 중앙에 3개의 벙커를 배치했다. 그린에 못 올리면 바로 벙커행(行)이다. 신종창 코스관리팀장은 “굿샷은 보상, 미스샷은 페널티를 준다는 점에서 변별력이 확실한 코스”라고 소개했다. 강명길 지배인은 “벙커가 고마울 때도 있다”며 “공이 그린 뒤로 넘어가면 OB인데 벙커가 그걸 잡아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푹 숙였던 고개를 들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한편의 그림이 펼쳐졌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와 잔잔한 호수, 울창한 나무숲, 빽빽한 초록 잔디가 어우러진 풍광은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장관이었다. 여기가 레이크사이드CC에서 첫손에 꼽히는 ‘1경(景)’이란다. 포토존도 마련돼 있다.
1990년 재일동포 사업가 윤익성 회장이 설립한 레이크사이드CC는 2014년 제일모직(현 삼성물산)이 인수하면서 삼성그룹의 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삼성물산 잔디환경연구소가 개발한 안양중지 대신 조이시아(페어웨이, 러프)가 심어져 있다. 삼성이 인수하기 전에 심은 잔디 상태가 좋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티잉 에이리어에는 켄터키블루그래스, 그린은 벤트그래스가 식재돼 있다.
용인=최진석 기자 isk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