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기업의 재고자산이 180조원을 웃도는 등 사상 최대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소비 심리 위축으로 수요가 급감하면서 창고에 쌓아둔 재고가 급증했다는 분석이다. 올 3분기 말 삼성전자의 재고자산은 60조원에 육박했다. 기업들의 재고자산 가치 하락으로 인한 재고자산평가손실도 7조원에 달했다.
23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3분기 말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 LG화학 포스코홀딩스 등 시가총액 30대 주요 상장사(금융회사 등 제외) 재고자산은 181조6222억원으로 집계됐다. 사상 최대 규모다. 작년 말보다 62조7092억원(52.7%)이나 불어났다.
재고자산은 가전·반도체 등 전자기업 위주로 큰 폭으로 증가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3분기 말 재고자산은 각각 57조3198억원, 14조6649억원이었다. 작년 말보다 각각 38.5%, 64.4% 급증했다. LG전자 재고자산도 11조2070억원으로, 작년 말 대비 14.8% 늘었다.
재고자산 증가 폭은 이들 회사의 매출 증가 폭도 웃돌았다. 시가총액 30대 상장사의 3분기 누적 매출은 878조1139억원으로, 작년 동기 대비 22.6% 늘어나는 데 그쳤다. 매출보다 재고자산 증가율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제품이 팔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불어난 재고자산은 기업 실적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30대 상장사의 재고자산평가손실은 3분기 누적으로 6조9772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들 기업의 지난해 전체 재고자산평가손실(3조8799억원)과 비교해도 두 배가량 증가한 것이다. 재고로 보유한 기간이 길어지면서 재고자산의 현재 가치가 큰 폭으로 떨어진 결과다. 가령 구형 스마트폰 재고는 신상품이 출시되면서 가격이 큰 폭으로 하락하는 구조다.
재고가 쌓이는 것은 소비를 주도하는 가계의 씀씀이가 줄어든 결과다. 가계의 씀씀이를 보여주는 지표인 소매판매는 지난 9월에 전달보다 1.8% 감소했다. 3월부터 5개월 연속 내림세를 보인 소매판매는 8월 잠시 반등했지만 한 달 만에 또다시 감소세로 전환했다.
불어난 재고가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기업들의 투자와 고용 위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재고가 창고에 쌓이는 상황에서 새로운 설비를 도입하거나 신규 인력 충원에 나서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다.
‘재고 증가→투자·생산·고용 감소→소비 위축→재고 증가’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시작됐다는 경고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