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이 글로벌 암호화폐거래소 FTX의 파산 신청 이후 저점을 경신하면서 22일 다시 1만5000달러대로 주저앉았다. FTX에서 수천억원 규모 암호화폐를 빼낸 해커가 이더리움을 대량으로 매각하면서 투자자들의 ‘공포’ 심리를 부추겼다. 출금 중단을 선언한 암호화폐 대출업체 제네시스글로벌캐피털에 이어 암호화폐 운용사 그레이스케일이 암호화폐 보유 내역 증빙을 거부하자 투자자 신뢰가 바닥을 치는 분위기다. 국내에서도 투자자 보호 규정이 미흡해 가상자산업권법 도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연쇄 뱅크런 위기 맞은 코인업계비트코인은 이날 오전 11시께 1만5816달러로 전날 같은 시간 대비 2.5% 하락했다. 오전 7시엔 1만5649달러까지 추락하며 바이낸스가 FTX 인수를 철회한 9일 시세(1만5742달러)를 밑돌았다. 이더리움과 바이낸스코인, 에이다, 도지코인 등 주요 알트코인이 모두 내렸다. 지난 1주일간 이들 알트코인은 10% 이상 하락폭을 나타냈다.
FTX에서 약 5억달러어치의 암호화폐를 훔친 해커가 이더리움을 내다 팔면서 이 같은 하락세가 지속되고 있다는 게 업계 시각이다. 이 해커는 15일 오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이더리움 22만8523개 중 2만5000개를 비트코인으로 바꿨다. 나머지 20만 개도 여러 차례 ‘세탁’을 거쳐 매각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암호화폐 운용사 그레이스케일이 암호화폐 보유 내역 증빙을 거부한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그레이스케일은 앞서 출금을 중단한 제네시스글로벌캐피털과 함께 디지털커런시그룹(DCG) 자회사로 운용자산이 20조원을 웃돈다.
제네시스글로벌캐피털이 이날 “유동성 조달을 위한 노력이 실패하면 파산 신청을 할 수 있다”고 밝힌 데다 그레이스케일마저 준비금 증명을 거부하면서 불난 데 기름을 부었다. 논란이 일자 그레이스케일은 신탁상품의 암호화폐를 보관 중인 코인베이스의 증명 서한을 공개했다. DCG나 제네시스글로벌캐피털이 파산해도 그레이스케일에 맡긴 암호화폐는 안전하다는 얘기다. 그러자 이번에는 코인베이스가 위기를 맞았다. 기관투자가들이 코인베이스에서 암호화폐를 빼낼 것이란 전망에 힘이 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전날 코인베이스의 10년 만기 회사채 금리는 사상 최고점인 연 13.5%를 돌파했다. 국내 거래소는 과연 안전할까암호화폐업계가 신뢰를 잃은 건 FTX가 투자자 명의로 예치된 암호화폐에 손을 댔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거래소가 과연 내 암호화폐를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높아지는 분위기다. 빗썸 산하 빗썸경제연구소는 이날 배포한 보고서에서 국내 FTX 사태는 원천 봉쇄돼 있다고 주장했다.
우선 거래소 이용자 예치금의 분리보관 의무를 근거로 들었다. 현행 특정금융거래정보법상 거래소를 포함한 가상자산사업자는 투자자 예치금과 고유 현금을 분리하도록 규정했다. 또 빗썸은 국내에선 거래소가 스스로 만든 암호화폐를 매매·교환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어 FTX 사례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규제의 맹점이 적지 않다는 평가다. 지금은 거래소에 맡긴 현금에만 분리보관 의무가 부여돼 있다. 암호화폐는 이 같은 의무가 없다. 금융당국의 직접 제재 권한이 없고 이를 검사할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국내 거래소들이 시재금이 없거나 지급을 거부해도 이를 법적으로 제재할 권한이 당국에 없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박진우 기자 jw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