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11월 16일 17:00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지난 10월 초 미국 정부는 슈퍼컴퓨터에 들어가는 첨단 반도체와 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발표 직후 뉴욕 북부의 소도시에 있는 IBM 왓슨리서치센터를 방문했습니다. 이곳은 양자컴퓨터 ‘이글(Eagle)’의 두뇌가 있는 곳입니다. 양자컴퓨팅은 100만 년이 걸릴 암호해독을 1초만에 해내는 미래 기술전쟁의 핵심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올해 노벨물리학상은 양자컴퓨터 과학자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정치인들이 경제와 산업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는 많지만 기술은 드뭅니다. 그런데 올해는 다릅니다. 미국 정치인들은 중국이 인공지능 기술 장악과 미래 쟁패를 준비 중이라며 민주주의 사회와 개방 경제, 세계 질서가 위험에 처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중국 시진핑 주석은 지난해 “기술혁신이 세계 전략 게임의 핵심”이라고 천명했습니다. 영국 정보기관은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신기술 투자를 늘려야 한다며 미국을 거들었습니다.
태평양 양쪽에서 이런 긴장이 조성되는 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중국의 연구개발 투자는 2008년 미국의 3분의 1, 유럽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2014년 유럽을 추월하더니 2020년에는 미국의 85% 수준까지 증가했습니다. 2020년 중국의 연구개발 투자는 6600억 달러로 8000억 달러인 미국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특허 건수는 2015년 이미 미국을 추월하였습니다. 양국은 인공지능(AI), 반도체, 바이오, 에너지, 양자컴퓨팅 등 5개 분야를 두고 치열하게 맞붙고 있습니다.
2020년 전 세계 연구개발 투자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2.5% 이상인 2조1000억 달러로 역대 최고 수준입니다. 그런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전략적 산업과 관련한 연구개발 자금과 첨단기술 제품 생산 지원에 민간보다는 정부의 역할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산업정책에 필수적인 다양한 방식의 펀딩과 더불어 과실도 자국이 더 챙기겠다고 합니다. 물론 차이도 있습니다. 중국은 전적으로 정부가 모든 것을 주도합니다. 반면 미국은 대학, 비영리기관, 민간기업에게도 상당한 자율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사실 정부 주도의 기술혁신은 새로운 게 아닙니다. 미국은 1950년대부터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 등 정부기관을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DARPA는 1950년대 말 유인 우주선을 쏘아 올린 소련에 우주 패권을 내줄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최첨단 우주기술 개발에 나섰습니다. 그 결과 달에 유인 우주선을 착륙시켰습니다. 인터넷 개발도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정부의 주도적인 역할은 1980년대 말까지 이어지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줄어들었습니다. 반면 민간의 역할이 커졌습니다. 구글과 페이스북, 아마존, 애플이 번창하였던 것은 바로 이때였습니다. 중국은 개방 전까지는 기술혁신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다가 21세기 초 전면 개방 이후 알리바바, 바이두, 텐센트, 화웨이 등 민간기업들을 중심으로 기술혁신이 전개되었습니다.
이처럼 두 나라는 21세기 들어 정부보다는 민간 주도로 기술혁신이 일어나며 양강 경제체제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100여 년 전 2차산업혁명 이후 정부 주도로 축적된 원천기술과 민간기업의 창의성이 결합하며 압도적인 우위를 지켜왔습니다. 반면 중국은 기술축적 기간은 불과 20여 년에 불과하지만 엄청난 자국 시장과 냉전종식 후 확장된 해외시장을 기반으로 초압축 성장을 거듭하며 미국의 턱밑까지 위협하고 있습니다. 현재 중국은 리튬베터리와 5G 통신에, 미국은 바이오, 클라우드컴퓨팅, AI에 앞서 있습니다. 중국은 AI와 코로나 백신 개발을 가속화하며 미국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동안 잘해왔던 민간 주도의 기술혁신에 대해 중국과 미국이 정부의 역할을 강화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여 년의 흐름에 대한 반작용 때문입니다. 중국은 비디오게임과 전자상거래 등 소비자를 상대로 하는 기술기업의 번창을 무질서한 자본 확산으로 규정하고 AI, 반도체, 그린테크 집중으로 몰고 있습니다. 미국은 피터 틸 같은 실리콘벨리의 전설들이 소프트웨어와 빅데이터 분석 등 ‘비트(bit)’ 투자는 과도했던 반면 하드웨어와 제조 등 ‘아톰(atom)’은 소홀했다고 지적합니다. 양국 모두 국경이 무의미한 빅테크들의 확장만으로는 근본적인 국가 경쟁력 강화에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정부 주도의 기술전쟁에는 자본과 인력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중국은 디지털 기술기업 통제로 모험자본 투자가 감소 추세이나 미국은 오히려 증가하였습니다. 중국은 경직적인 제로(0) 코로나 정책으로 해외자본이 이탈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력입니다. 중국은 외국인 근로자 중 상당수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개방 이후 경제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해외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바다거북’들의 힘이 컸습니다만, 2020년부터 이런 흐름이 끊겼습니다. 세계 최고 인공지능 전문가 중 60%는 미국에서 일하고 3분의 2가 외국인입니다. 반면 중국은 대부분이 중국인으로 해외 인력은 30%에 불과합니다. 기술전쟁의 승패가 가늠되는 대목입니다.
경제 성장에서 노동과 자본 이외에 총요소생산성(TFP)이라는 기술 요인이 매우 중요합니다. 총요소생산성은 GDP 증가의 주요 원동력으로서, 노동과 자본보다 생산성을 더욱 빠르게 증가시킵니다. 기술 진보를 통해 단위 생산량에 드는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노동생산성 향상은 평균임금 인상과 여가시간 확대로 이어져 재화와 서비스 수요를 창출하고, 다시 공급이 활성화되는 선순환이 구축됩니다. 하지만, 빅테크 등 디지털 기술기업이 주도하고 있는 4차산업혁명이 기술 진보의 선순환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의 빅테크들이 너나없이 영토를 가리지 않고 문어발식 확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성공신화로 추앙받다가 몰락하였던 GE의 길을 가고 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소비자 중심의 디지털 기술기업이 한계에 이른 것 아니냐는 느낌이 듭니다. 미국 정부가 제조업 르네상스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공급망 회복과 중산층 일자리 창출에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그리고 민간 중심의 완전 자유시장만으로는 국가의 실존적 위협에 대처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인식도 작용한 것 같습니다.
영화 ‘듄’에서 주인공은 시공을 초월한 존재입니다. 그는 사막에 존재하는 불멸의 물질을 독점하여 전 우주를 장악하려는 황제에 대항합니다. 그런데 절대 권력의 황제와 주인공 모두 물질을 두고 전쟁을 벌인다는 게 아이러니입니다. 한국은 원초적 물질이 없고, 최첨단 기술력도 아직 밀립니다만 제2, 제3의 물질을 만들어내는 역량이 뛰어납니다.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가 어떻게 끝나든, 또다른 제조 르네상스 기회가 기대됩니다. 다시 ‘아톰’을 가까이할 때입니다.
*필자는 삼일회계법인과 KDB산업은행에서 근무했으며 벤처기업 등을 창업·운영하였습니다. 현재는 사모펀드 운용사 서앤컴퍼니의 공동대표로 있습니다. <슈퍼파워 중국개발은행>과 <괜찮은 결혼>을 번역했고 <디지털 국가전략: 4차산업혁명의 길>을 편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