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국민의 안전을 보호하는 것이다. 현대의 정부론 자체가 국민 안전이란 개념에서 시작됐다. 근대의 선구자 중 한 명인 토머스 홉스는 무정부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묘사하며, 국민이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사회계약을 통해 정부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정부에 관한 생각은 지금도 비슷하다. 오늘날의 헌법들은 국민 안전을 정부의 최우선 의무로 규정한다. 쟁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민 안전을 어떻게 제대로 지킬 것이냐를 두고 논쟁이 있다. ‘작은 정부’와 ‘큰 정부’가 대표적 쟁점이다.
작은 정부론을 처음 꺼낸 것은 진보파였다. 자유주의의 시조라고 할 존 로크는 군주가 국민의 안전(생명, 자유, 재산)을 침해할 수 있다며, 정부를 의회가 만든 법의 테두리 안에 가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보주의 계보의 시작점에 있는 존 스튜어트 밀은 민주주의라 하더라도 ‘다수의 독재’가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하며, 원칙적으로 정부 개입은 적을수록 좋다고 역설했다. 진보의 가장 왼쪽에 있는 마르크스는 아예 국가의 소멸을 외쳤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가 국가를 대신해야 한다는 게 그의 비전이었다.
사실 큰 정부론은 20세기 초까지 왕정복고파나 히틀러·스탈린 같은 독재자들의 논리였다. 현대적 의미의 큰 정부론은 케인스주의 이후에 출현했다. 정부가 개입해야 시장의 실패를 막을 수 있다는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지는 정부론이 20세기 중반에 선진국을 지배했다. 국민 안전의 경제적 토대를 강조하던 진보세력은 작은 정부론을 버렸고, 보수세력이 정부의 간섭에 맞서 개인적 자유를 옹호하는 작은 정부론을 옹호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큰 정부론은 위기에 봉착했다. 세계적 스태그네이션에 대응하지 못한 탓이다. 이때 신자유주의로 불린 대안이 출현했다. 신자유주의는 큰 정부의 비효율성과 민간에 대한 규제를 정부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리고 민간 주도 경제를 위해 정부의 역할을 사회 ‘안전망’ 구축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정책개혁을 제시했다. 말하자면, 가성비 좋은 작은 정부론이다. 그러나 부작용이 꽤 컸다. 경제적 양극화로 상대적 빈곤층이 많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21세기 들어서 내전이라 불릴 만큼 국민 간의 정치적 충돌이 잦아졌다. 국민의 불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국민 안전이 위태로워지면 자연스레 큰 정부론이 확산한다. 이코노미스트는 올해 신년 특집으로 코로나19 사태가 “큰 정부의 복귀”를 유발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최근 유럽에서는 극우파 정당들이 “인권 대신 안전”이란 프레임을 내걸고 지지자를 모으고 있다. 시진핑은 정보기술(IT)을 이용해 국민의 미시적 행동까지 감시하는 거대한 파놉티콘을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대동세상’, ‘억강부양’ 같은 나라님이 모든 걸 해결한다는 봉건적 정부론이 대선에서 50%에 육박하는 지지를 받았다. 큰 정부의 복귀를 넘어 ‘거대 정부’의 시대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작은 정부를 내세운 윤석열 정부가 국민의 안전 문제로 신뢰를 잃었다. 이태원 참사를 수습하는 태도부터 논란이다. 정부 책임자들이 변명만 늘어놓아서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작은 정부는 국민에게 무정부 상태와 다르지 않다. 반작용을 불러일으킨다. 윤 정부가 자칫 거대 정부로 가는 지름길을 놓아 줄 수도 있다. 이태원 참사의 원인, 방지책, 책임자 처벌까지 확실하게 해야 한다. 국민 안전에 관한 정부 철학을 갖추지 못한 고위직 인사들은 주저함 없이 내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