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스로이스, 벤틀리, 맥라렌, 애스턴마틴 등 '럭셔리카의 본고장' 영국이 전기자동차 전환 국면에서는 맥을 못 추고 있다. 영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기대하며 설립된 전기차 배터리 스타트업 브리티시볼트가 3년만에 파산 위기에 몰리면서다.
2일(현지시간) 브리티시볼트는 "회사가 오는 12월 초까지 사업 운영을 버틸 수 있는 단기 자금을 민간에서 지원받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해당 자금의 출처는 스위스의 세계 최대 광산업체 글렌코어다. 글렌코어는 올해 2월에도 브리티시볼트에 4000만파운드(약 650억원)를 투자한 주요 투자자 중 한곳이다. 이번엔 500만파운드(약 81억원) 규모로 긴급 자금을 수혈해줬다.
브리티시볼트는 "11월 한달동안 300명에 달하는 전직원들은 감봉, 임원들은 무급으로 일하며 회사 정상화에 힘쓰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파산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브리티스볼트의 유동성 위기와 파산설은 9월부터 급속도로 퍼졌다. 그러다 지난 주말새 영국 정부가 회사의 3000만파운드 긴급 자금 신청을 거절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산 위기가 기정사실화됐다.
불과 올해 초까지만 해도 영국 정부의 야심작이자 자랑거리였던 브리티시볼트의 몰락에 영국 가디언은 "'완벽히 충전됐었던(브리티시볼트가 전기차 배터리 제조사라는 점을 염두에 둔 표현)' 스타트업이 생명유지 장치가 필요한 환자가 됐다"고 보도했다. 지난 2월 보리스 존슨 당시 총리는 자신의 SNS를 통해 "전 세계 많은 자동차 제조사들이 전기차 전환을 서두르는 와중에 우리 영국은 (브리티시볼트를 통해) 자국산 경쟁우위를 만들어나가고 있다"며 추켜세웠다.
이는 브리티시볼트가 상대적으로 낙후한 북동부 도시 블라이스에 38억파운드짜리 기가팩토리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한 데 대한 '선전용 SNS'였다. 정부의 기후변화 대응과 일자리 창출 노력등에 기여하는 브리티시볼트를 위해 "영국 정부도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브리티시볼트의 몰락을 두고 러시아 전쟁에 의한 에너지 대란, 미국 중앙은행(Fed)의 긴축발 글로벌 경기침체 공포 등이 배경으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처음부터 과대 포장된 기업"이라는 비판에 힘이 실리는 모양새다. 가디언은 "브리티시볼트는 2019년 한 스웨덴 사업가에 의해 처음 설립된 이후 기술력에 대한 그 어떤 정보 제공(트랙레코드)도 없이 광고와 투자에만 올인해왔다"고 지적했다. FT도 "시제품도, 공장도, 고객사도 없는 스타트업의 요란한 분투"라고 꼬집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브리티시볼트의 고객사는 애스턴마틴, 로터스 등이 전부다. 다만 자체 공장이 없는 브리티시볼트가 정부 주도의 배터리 산업 단지에서 애스터마틴 등이 요청한 배터리 셀의 시제품을 일부 개발하는 데 성공한 게 현재까지 업력의 전부라고 한다.
FT는 "브리티시볼트는 영국 자동차 제조사들의 전기차 전환 과정에서 '영국제 부품'을 쓰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별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이용해 급성장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현재 영국에는 중국 배터리 제조사 엔비전이 일본 자동차 제조사 닛산과 함께 투자 및 설립하기로 한 배터리 공장 외에는 관련 설비가 전무하다.
한편 브리티시볼트는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포스코케미칼과 씨아이에스, 하나기술 등 한국 기업들과도 부품 공급 및 연구개발을 위한 양해각서를 맺은 바 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