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송도 국제업무단지(IBD) 개발을 두고 미국 부동산 개발회사 게일인터내셔널과 벌인 25억달러(약 3조5500억원) 규모 분쟁에서 승소하면서 한국의 국제중재 경쟁력이 재조명받는 분위기다. 최근 대형 국제중재에서 연이어 승소 소식이 들려오면서 ‘경제적 위상에 비해 약하다’는 인식이 주를 이뤘던 국제중재 역량이 조금씩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수조원대 분쟁서도 승리국제상업회의소(ICC)는 지난달 28일 “포스코건설이 합작 계약을 위반했다”며 게일인터내셔널이 2019년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중재에 대해 기각 결정을 내렸다. 이 분쟁은 론스타가 2012년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투자자-국가 분쟁해결(ISDS·46억7950만달러) 이후 10년간 정부와 국내 기업이 휘말린 중재 중 가장 큰 규모로 관심을 모았다.
▶본지 2022년 11월1일자 A1,12면 참조
포스코건설은 중재과정에서 20년 전 게일인터내셔널과 합작관계를 맺은 뒤 지금까지 벌어진 사실을 면밀히 들여다보면서 △경제자유구역 사업시행자의 지위·권한·의무 △프로젝트 파이낸싱 △합작 계약 △질권 계약 △부동산개발사업 △한국과 미국 조세제도 △부동산 가치평가 등에 관한 법률에 위반되는지를 확인해왔다. 사실관계 파악을 위해 참고한 자료만 10만여건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상 국내 경제자유구역에서 외국인과 부동산 개발사업을 할 때 생길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법률문제를 살펴봄으로써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다.
포스코건설에 앞서 지난 8월 말엔 한국 정부가 외환은행 매각을 두고 미국 론스타와 벌였던 투자자-국가 분쟁해결(ISDS)에서 기대 이상의 판정결과를 이끌어냈다. 중재판정부가 한국 정부에 부과한 손해배상액은 2억1650만달러(약 2800억원)로 론스타가 당초 제기한 금액인 46억7950만달러(약 6조6500억원)보다 대폭 축소됐다.
지난해에는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이 홍콩계 사모펀드(PEF) 운용사 어피니티 등과 벌인 2조5000억원 규모 국제중재에서 사실상 승기를 잡았다. 어피티니 등 재무적 투자자들은 “2012년 교보생명 지분을 사들일 때 신 회장 측과 정한 주당 40만9000원으로 풋옵션(일정 가격에 지분을 되팔 권리)을 행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주장했지만 ICC 중재판정부는 “어피니티 측이 풋옵션을 가졌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신 회장 측이 풋옵션 가격을 40만9000원으로 받아들일 의무는 없다”고 판정했다.
같은 해 인천시도 인천 영종국제도시 용유·무의도 인공 관광레저 도시(에잇시티) 개발사업 무산에 대한 책임을 두고 독일 캠핀스키와 벌인 국제중재에서 승소했다. 화장품기업, 식자재기업 등 다른 국내 기업도 외국 회사와의 중재에서 연이어 이겼다. 법조계 관계자는 “굵직한 국제분쟁에서 한국의 중재역량이 올라왔음을 보여주는 판정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위상 달라졌으나…넘을 산 많아대형 로펌을 중심으로 민간영역에서 국제중재 분야에 대한 꾸준한 투자가 이어진 것이 조금씩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는 평가다. 현재 김앤장법률사무소, 법무법인 광장·태평양·세종·피터앤킴 등이 국제중재 전문지인 영국 글로벌 아비트레이션 리뷰(GAR)가 매년 발표하는 국제중재 분야 세계 100대 로펌에 들며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과거엔 글로벌 시장에서 보기 어려웠던 한국인 중재인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20~30명의 한국 변호사가 ICC와 세계은행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의 국제중재 사건에서 중재인을 맡는 등 세계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지난 6월엔 박은영 김앤장 변호사가 국제중재법원 독립 중재인(전담 판사 역할)으로 새 출발하며 주목받기도 했다.
다만 세계적인 수준에 오르려면 갈길이 멀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한국은 아직 아시아 중재시장에서도 홍콩과 싱가포르 등을 추격하는 입장이다. 국제중재실무회가 한국의 중재기관인 대한상사중재원(KCAB)으로부터 의뢰받고 지난 2월 국제중재를 많이 활용하는 국내 27개 기업의 해외 법무 담당 팀장급 사내변호사를 심층 인터뷰한 결과 ICC, SIAC(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 LCIA(런던국제중재법원) 순으로 국제중재기관을 많이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선호하는 중재지로는 런던과 싱가포르가 주로 지목됐다.
김진성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