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0조원 규모의 채권시장안정펀드를 조성한 지 1주일이 지났지만 시장 불안 해소에는 역부족인 것으로 나타났다. 단기 자금 조달이 절실한 건설사들의 ‘돈맥경화’는 점점 심각해지는 것으로 전해졌다. 채안펀드가 매입할 수 있는 기준이 사실상 최고 신용등급인 A1 기업어음(CP)으로 제한돼 대다수 건설사가 혜택을 보지 못하는 실정이다. 현장에선 ‘그림의 떡’에 그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20조원 채안펀드 그림의 떡” 비판1일 건설 및 증권업계에 따르면 채안펀드가 지난달 말 가동 첫주에 사들인 채권 규모는 3000억원가량에 그쳤다. 대다수 건설사가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국내 최대 재건축사업지인 서울 둔촌주공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매입에 채안펀드도 참여했지만 900억원을 인수하는 데 그쳤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채안펀드를 집행할 운용사들이 매집을 위한 가이드라인도 세우지 않아 자금을 구할 수가 없다”며 “금융당국과 시중은행이 95조원을 풀겠다고 하지만 이마저도 못 믿는 분위기”라고 했다.
채안펀드의 혜택을 볼 수 있는 신용등급 A1 이상 건설사는 현대건설 삼성물산 DL이앤씨 정도다. 나머지 10대 건설사는 모두 A2~A3 정도의 신용등급을 유지하고 있다. 증권업계 PF업무 관계자는 “채안펀드 집행을 위해 건설사가 신용평가를 받은 건수가 전무하다”며 “은행은 몇 달 전부터 대출 문을 걸어 잠갔고 새마을금고 등 2금융권도 대출심사가 전면 중지된 상태로 사실상 금융이 건설을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10대 건설사도 본PF 전 임시대출 격인 브리지론을 받으려면 연 13% 안팎의 고금리를 내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건설업계 한 관계자는 “A2등급 대기업그룹 건설사도 어려움을 겪는데 B등급인 중견·중소 건설사들은 자금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공공기관 회사채도 연 5% 넘어
회사채시장 전반의 불안감도 여전하다. 건설사 회사채가 헐값에 거래돼 시장 참여자들이 화들짝 놀라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중견 건설사 한신공영의 발행금리 연 5%짜리 내년 3월 만기 회사채가 이날 연환산 수익률 65%의 가격에 거래되자 투자자들은 앞다퉈 이 회사의 이상 여부를 확인했다. 이후 채권 가격이 반등하고 해당 거래가 소액에 그친 것으로 밝혀져 기관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최근 건설사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BBB등급 건설사 회사채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했다.
일반 우량기업의 회사채 발행도 쉽지 않다. 정부가 공공기관에 채권 발행 자제를 요청했음에도 한국전력 등 공기업들이 여전히 공사채를 쏟아내 자금을 빨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일부 공사도 목표한 자금을 채우지 못한 실정이다.
한국도로공사(신용등급 AAA)는 이날 공사채 입찰을 해 2년 만기 2900억원, 3년 만기 400억원 등 3300억원어치를 연 5.9% 금리에 발행했다. 2년 만기 채권은 목표를 채웠으나 3년 만기는 애초 목표로 한 1500억원에 미달했다. 공기업의 자금 흡수 여파로 민간 회사채 시장 큰손인 SK㈜는 채권 대신 단기자금 소요에 쓰이는 CP로 자금 조달에 나섰다. SK㈜는 다음달 2000억원 규모의 3년과 5년 만기 어음을 발행한다고 이날 신고했다. 공기업 회사채 발행이 민간시장 자금 경색으로 이어지는 상황과 관련,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공사채 발행에 대한 정부의 입장 발표가 있을 것”이라며 “한전도 자금 조달이 필요한 상황인데 어떻게 해결할지 논의하고 있으니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박종필/장현주/이현일 기자 jp@hankyung.com